[영화觀] 거대한 자유
입력 : 2023. 02. 24(금) 00:00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영화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
[한라일보] 겨울의 막바지였던 지난 주말에는 가족 여행으로 수안보에 다녀왔다. 온천이 유명한 곳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곳인데 막상 가보니 제천과 단양, 충주의 다양한 관광명소들을 오가기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청풍명월을 느낄 수 있는 유람선과 케이블카는 호수 위에서, 산 꼭대기에서 신비로운 자연 경관을 누릴 수 있는 문명의 혜택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에 나는 심드렁하게 굴었지만 막상 나아가는 배 위에서 마주하는 풍경과 산 밑으로 펼쳐진 장쾌한 자연의 형상에는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리 좋은 기종으로도 어떤 신박한 포즈로도 담을 수 없는, 그저 눈에 담고 마음에 간직할 원본 이상의 원형을 마주하면서 이 산이, 이 호수가 어떻게 여기에 태어났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날은 인공눈물을 넣지 않았는데도 눈이 맑았다. 알 수 없는 개운함과 영원히 모를 경이의 실체 앞에서 고민 없이 자유로웠다.



박재범 감독의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툰드라에 사는 소녀 그리샤의 이야기를 그린 극장용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무려 45년 만에 선보인 스톱모션 기법의 이 영화는 자연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는 소녀의 고군분투를 담고 있다. 태어난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닥치는 외부의 위협과 그 위협을 극복하는 신비로운 모험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작품의 만듦새와 꼭 닮아있다. 전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제작되는 수작업 방식인 스톱 모션은 긴 시간과 그만큼의 정성이 필요한, 만든 이의 온기가 캐릭터들에게 고스란히 전이될 수 밖에 없는 작업이기도 하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약 3년 3개월의 제작 기간을 거쳐 70분이 채 안되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누군가의 세심한 손길로 생명을 얻은 이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 앞에서의 겸손함을 말한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삶을 귀하게 여기고, 자연의 위대함 앞에 감탄과 존경을 말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교조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메시지를 전하기 가장 적합한 방식을 택해 긴 시간을 고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좁은 영토 안에서 미지의 땅인 툰드라로 확장한 시야 그리고 그보다 멀리를 내다보는 인간과 자연의 유대라는 고전적인 교감으로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넓게 오르고 내리는 위태로운 숫자들의 레이스로 빼곡한 작금의 영화판 레이스 안에서도 순록에 올라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멈추지 않는 그리샤를 닮은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을 알고 있고 그 길에 만나는 바람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는 작고 위대한 움직임들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델리아 오언스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습지에 살던 한 여성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범죄 미스테리와 로맨스가 어우러진 복합 장르의 영화이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은둔자인 주인공 카야에게 허락된 유일한 낙원인 습지의 풍경들이다. 가정 폭력과 가난으로 어려서부터 홀로 성장해야 했던 여성 카야를 유일하게 품어주었던 자연과 그 자연과 어우러지며 스스로의 재능과 삶을 찾아냈던 한 여성의 이야기. 오히려 이 영화에서 카야의 로맨스는 그녀를 스쳐간 두 남자가 아니라 늘 그녀를 품에 안았던 자연이 대상인 것처럼 느껴진다.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물의 울음을 만질 수 있으며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자연과 가까이에서 오래 함께 였기 때문일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한 인간을 키우는데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자연 안에서 비롯됨을 이야기하는 생태주의적 영화다. 한 개인이 어떤 환경 안에서 성장했냐는 물음은 언제부터인가 인위적 자장 안에서 파생된 것들만을 답으로 인정하곤 했다. 그러나 가족과 사회로부터, 교육의 기회로부터 벗어난 카야의 삶을 키우고 돌보고 지켜주는 것은 카야가 태어난 곳에 놓여진 자연이다. 인생의 모진 풍파가 지나간 뒤 그녀가 편안하게 몸을 누일 수 있는 곳 또한 그곳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어디인지 영화는 정확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관객들은 그 소리를 감각하는 카야를 본다. 새와 풀과 물과 밤이 뒤엉킨 축축한 습지에서 보낸 그녀의 평생이 조금도 눅눅하지 않았다.



자연주의 시인인 메리 올리버의 '블랙 워터 숲에서'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만 하지'라고 썼다. 그 세가지는 '유한한 생명을 사랑하기/자신의 삶이 그것에 달려 있음을 알고 그것을 끌어안기/그리고 놓아줄 때가 되면 놓아주기'이다. [엄마의 땅:그리샤와 숲의 주인]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들은 그 거대한 자유를 알고 있는 이들일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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