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출향해녀/ 기억의 기록] (2)출향 배경과 생활
입력 : 2023. 05. 31(수) 00:00수정 : 2023. 07. 04(화) 18:33
이태윤·강다혜 기자 lty9456@ihalla.com
"물골에 몸 뉘이고, 주린 배는 갈매기알로 채우고"
제주해녀, 1940년부터 1970년까지 독도서 원정 물질 이어가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 모집에 의해 집단 거주·작업 시작
독도 서도의 ‘물골’서 생활… “물개·갈매기알로 배고픔 달래”




[한라일보] 제주해녀들의 무대는 한반도 동해안과 남해안을 지나 러시아,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까지 뻗쳤다. 그 가운데 우리 땅 독도가 있다. 독도에 침입하는 일본 어선과 순시 등에 맞서 독도를 지켜낸 민간 조직으로 기록된 '독도 의용수비대' 결성 전부터 제주 해녀의 물질은 시작됐다. 독도 출향 해녀는 독도 의용수비대와 함께 독도 수호에 앞장섰던 항일 항쟁가로서, 지역사회에 헌신한 사회 활동가로서, 생계를 책임진 강인한 여성상으로 기록돼 있다. 본보는 항일운동가 또는 제주의 강인한 여성상이라는 평가를 넘어, 여성 노동자로서 제주 해녀 개인의 '삶의 이야기'와 함께 독도의용수비대와의 협력적 관계를 두 차례에 걸쳐 다룬다.

독도 전경. 한라일보DB


▶제주 해녀, '독도 바당'으로=제주해녀들의 독도 물질은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장기간 독도에서 머물며 물질을 한 제주 해녀의 기록은 1950년대부터 등장하는데,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미역 등 수산물 채취를 위해 해녀 수십 명을 모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제주해녀의 독도어장 진출은 김수희 독도재단 교육연구부장이 지난 2012년 발간한 논문 '독도어장과 제주해녀'에 상세히 담겼다. 이 논문은 해방 후 독도 어장과 제주 해녀들의 독도 어장 진출을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일제시대 매해 3000명 이상의 제주출신 해녀들은 제주를 떠나 한반도 전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 일대에서 활동했다. 해녀들이 채취한 생산품은 일본에서 양갱이나 과자를 만드는 재료, 상처를 소독하는 의약품이나 화약을 만드는 재료, 비단을 짜는 풀이나 건축용 자재로 사용되는 우뭇가사리, 감태 등이었다. 이러한 해조류들은 일본 공업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공업용 원료였기 때문에 총독부는 해녀어업을 보호하고 한반도어장에서의 해녀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독도 서도의 물골. 제주해녀박물관 제공
그러나 해방후 해녀들의 어업 활동은 국내어장으로 축소됐고, 어업 환경은 차별과 멸시로 더욱 악화됐다. 육지 해조류 어장 주민들은 자신들의 어장에서 활동하는 해녀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제주 해녀의 입어를 거절하기도 했다. 해방후 활동 어장이 사라진 제주 해녀들은 어업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인권 유린을 당하면서도 육지어장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제주해녀의 어업적 기반이 붕괴됐을 때 독도 어업이 시작됐다고 해당 논문은 밝히고 있다. 김수희 교수는 "어업 공간이 없었던 제주해녀들은 모집에 의해 적극적으로 (독도로)건너갔다"며 "제주 해녀들이 독도에 직접 건너간 것은 1953년 이후 독도의용수비대가 해녀를 모집해 고용한 이후"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제주해녀의 독도 진출은 1940년경 일본인들이 제주 해녀를 고용하여 성게 채취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들은 장기간 독도에 거주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해방 후 울릉도에 간 제주 해녀의 증언에 의하면 울릉도에는 해녀들이 없었고, 대규모 이동은 1952년 9월 한국산악회가 제2차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을 파견했을 때 제주해녀 14명이 조사를 목적으로 함께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스스로 독도에 간 해녀들은 독도의용수비대의 모집에 의해 간 해녀"라고 평가했다.



▶"물골에 몸 뉘이고, 갈매기알로 주린 배 채우고"=독도 물질에 나선 해녀들은 독도 서도의 '물골'에서 몇 달씩 머무르며 물질을 했다. 물골은 독도에서 유일하게 물이 솟아오르는 독도 서도의 천연 동굴이다. 독도에는 전복, 소라 등 다양한 해산물이 있었지만 해녀들은 주로 미역을 채취했다.

해녀들은 물골 자갈밭에 가마니 몇 장을 깔고 자거나 단체로 50여명이 갔을 때 물골에 나무를 이용하여 2층으로 단을 만들어 살았던 것으로 기록됐다.

가재바위. 제주해녀박물관 제공
제주해녀박물관이 발간한 '제주해녀의 재조명'(2011) 가운데 '독도 출가해녀와 해녀항일'(좌혜경·권미선)은 당시 독도 물질에 나섰던 제주 해녀들의 구술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물골의 자갈밭에 가마니 몇 장을 깔고 얄팍한 군인 담요를 덮으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온 등을 누르는 돌을 가지런히 하느라고 잠을 설치길 일쑤다. 물골 앞의 '가재섬'에서 우는 물개들이 꺽꺽거리는 울음소리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더욱 깊어가게 했다".

해당 자료는 또 "해녀들은 독도로 출발할 때 몇 달치의 식량과 된장 등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식량이 부족하면 할 수 없이 갈매기알을 삶아 먹거나 쑥을 넣어 죽을 끓여 먹었다. 날이 나빠 전주(錢主)들이 오지 못하면 소라를 삶아먹고 엉엉우는 물개를 잡아먹기도 했다고 한다"고 전한다.

또 다른 해녀는 이렇게 말한다.

"보통 한 달을 사는데, 정말 힘들었어. 미역을 해서 저녁에 널어두면 파도가 쓸어가버려. 미역을 말리기 위해 널어놓다가 사람의 머리에 돌 떨어지면 죽어. 그래도 신이 있는 모양이라. 스르륵스르륵하면서 섬 꼭대기에서 돌들이 밑으로 떨어져도 해녀들은 맞아서 다치는 일이 없었어. 시아버지가 아기를 업고 다녀도 아무 이상이 없어. 미역을 널다가 보면 어느새 파도는 와서 다 쓸어가 버릴 때도 있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갈매기알과 물개를 잡아 먹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해당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구술이 기록됐다. "가지고 간 양식이 떨어지면 전주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오는데, 날이 궂어 배가 오지 못하면 양식이 바닥날 때도 있었다. 배고픔을 달래려고 바위에 하얗게 붙은 소라들을 떼어다가 삶는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엉엉 우는 물개를 잡아서 먹기도 하고, 갈매기 알들을 주워서 먹었다. 그때 먹었던 갈매기 알의 비린 냄새에 물려 이제는 계란도 일절 먹지 않는다".

김수희 교수는 위 논문에서 해녀들의 독도 생활과 관련해 "독도에는 하루 종일 고된 노동 후에 씻을 수 있는 물이 없고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동굴이 고작이었지만, 어장이 있었다"며 "다른 곳에서는 어장에 대한 착취와 방을 얻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지만 무인도 독도에는 방세 걱정도 없고 주위 시선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제주해녀들이 독도의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물질을 하며 삶을 영위한 데에는 독도의용수비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독도출향해녀 기억의 기록' 세 번째 차례에서는 제주해녀의 독도 출향 물질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와의 협력 관계와 함께 그들의 독도 수호 기록을 조명해 본다.

<특별취재팀=이태윤 정치부차장·강다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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