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4)자주운항운동-⑤동아통항조합의 좌절
입력 : 2024. 05. 28(화) 00:00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방향 전환 후 분열로 경영악화… 복목환 운항 정지
제3회 정기대회, 조합의 좌경화


[한라일보] 1932년 5월 27∼28일 오사카 천왕사에서 열린 동아통항조합 제3회 정기대회에서는 9개 항목의 행동강령과 9개의 슬로건을 채택했다.(사진 2) 새로운 행동강령으로 계급적 협동조합운동 촉진, 대중의 경제적 정치적 투쟁 참여, 무산계급운동의 전선 통일 등 계급투쟁 중심의 전투적 활동노선을 제시했다. 당시 일본 내 공산주의 운동의 계급주의 좌경화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조합의 활동노선이 급진화된 배경에는 일본공산당 산하조직인 전협(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의 입김이 있었다. 전협은 3회 정기대회를 계기로 조합의 간부 홍남석·김달준·장두환·김서옥 등을 통해 조합을 전협의 재원을 담당케 하고 오사카 거주 조선인 극좌운동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동아통항조합의 복목환. 출처 일본기선건명록
동아통항조합 제3회 정기대회 신문기사. 1932년 6월 4일자 동아일보.
3회 정기대회에서는 항운사업의 경영 강화 방안이 모색되었다. 우선 2만6000원에 달하는 부채를 갚고, 수송화물의 인수에 노력하기로 했다. "복목환 매입 경영 이후 4개월 동안 승객의 6할은 획득했으나, 나머지는 선박업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손실이다. 앞으로 계획적인 승객 획득 방안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적선불승동맹(敵船不乘同盟) 조직, 연설회·강연회 등 교육훈련 실시, "도항 자유, 민족차별 철폐, 조선 독립, 타도 일본제국주의" 등 정치적 데모 실행 등을 방안으로 내걸었다.

경영 강화와 더불어 복목환이 정박하는 곳을 중심으로 지부가 조직되어 갔다. 일본에는 오사카시내에 13개 지부와 기타 지역에 3개 지부를 두었다. 제주도에는 산지, 외도, 애월, 한림, 고산, 대정, 안덕, 중문, 서귀, 남원, 표선, 성산, 삼양, 구좌, 조천, 세화의 16개 지부와 제주도 외에 완도지부가 있었다.

동아통항조합은 제3회 대회를 계기로 공격적인 경영체제로 전환해 나갔다. 1932년 7월 8일에 열린 상임이사회에서는 개별 방문을 통해 조합 가입을 독려하는 돌격대 편성이 결정되었다. 기관지를 제작 배포하는 등 홍보와 회원 확대 사업에 힘썼다. 동아통항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오사카 일대에서 소비조합운동, 의료기관 설립운동, 부녀운동 등을 활발히 벌여나갔다. 조합장 현길홍도 낭화야학원(浪華夜學院)을 설립해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다.(사진 3) 이러한 활동 결과, 몇 달 뒤 조합원 수가 2만여 명으로 늘었다.



방향전환론의 대두, 끝내 운항 중지


많은 제주도민의 호응을 얻으며 조직을 키워가던 동아통항조합은 경영 측면에서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차입금은 누적되었고, 아마사키기선과 조선우선은 2원까지 선임 덤핑 공세에 나섰다. 직원들의 임금은 생활보장 수준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게다가 조합의 좌경화 정치 성향 때문에 일본 관헌의 탄압이 심해졌다.

동아통항조합장 현길홍의 낭화학원 관련 신문기사. 1930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
이에 1933년 2월 열린 임시대회에서는 조합을 계급투쟁조직이 아닌 순수 경영단체로 돌려야 한다는 '방향전환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후 방향전환 찬성파와 반대파 간에 극심한 분열이 일어나 조합의 운영은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다. 1933년 6월 14일 열린 제4회 정기대회에서 방향 전환이 정식 승인되고, 홍재영이 새로운 조합장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 한 해 복목환의 운항 횟수는 총 21회에 승객 수는 1만여 명이었다. 군대환과 경성환의 각 30여 회, 8000∼9000명에 비해 좋은 실적이었다. 양측에 비해 비싼 운임이고 운항 횟수가 2/3 정도임을 감안하면 선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만3000원에 달하는 거액의 부채를 해결하지 못한 채 복목환은 저당잡혀서 1933년 말부터 운항이 정지되었다. 결국 1934년 1월 임시총회에서 복목환을 처분해 빚을 갚기로 하고 조합은 계속 유지하기로 했지만, 1935년에는 조합원이 1000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어 이제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1934년 하반기에 일본 선박업자들은 배삯을 다시 8원으로 인상하고, 제주도내 기항지를 반으로 줄여버렸다. 조합관계자들은 이러한 처사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지만, 자주운항운동의 구심이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 그 대응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통항조합, 그 역사적 의의


완도 출신 동아통항조합원이 작성한 기업동맹 비난 글. 강요배 화백 기증자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동아통항조합은 많은 제주인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일본 회사들의 선임 인하 경쟁 속에서 적자를 해소하지 못한 채 좌절했다. 조합이 좌편향 계급투쟁 노선에 기울어져 민족과 제주지역 공동체를 우선하는 운동을 외면한 것도 결정적인 실수였다.

송산 김명식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더욱이 제주도 출신자들이 기업동맹과 동아통항조합으로 나누어져 따로 자주운항운동을 추진한 사실은 아쉽기 그지없다.(사진 4) 아무리 이념과 노선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열악한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조합원 확보, 모금운동 추진 등 같이 힘을 모아야 하지 않았을까. 1928년부터 오사카에 체류했던 조천 출신의 항일운동가 김명식(사진 5)은 동향의 고순흠(기업동맹)과 김문준(동아통항조합)과의 대화를 시도한 적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나는 통항조합과 기업동맹과의 합동을 주장하여 저들과 의견이 합치 아니한 관계로 한때 저들과 소격(疏隔)하였고 그 까닭에 나에게는 좀더 괴로운 일이 생겼다"고 술회한 것이다. 김명식(松山 솔뫼)과 고순흠(竹岩 대바위), 김문준(木牛 낭쉐)은 같은 조천 출신의 항일운동 동지였기 때문에 김명식의 아쉬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아통항조합을 위주로 한 자주운항운동은 제주 출신 도항노동자들에게 민족적·대중적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준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자주적이고 자존적인 운동의 방향은 민족적 차별에 시달리는 많은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동아·조선일보 등 국내 언론이 상당히 주목한 까닭도 이 운동을 단순히 제주사람들의 운동이 아닌 민족운동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또한 동아통항조합은 일본과 제주 현지에 지부를 따로 둠으로써 제주도민과 일본 거주 제주사람들 사이에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게 하였다. 비록 일본에 가서 어려운 노동 일을 하더라도 제주도민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던 자주운항운동의 모습에서 우리는 제주사람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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