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탐라제주 바다에 장보고가 다시 오다
입력 : 2026. 02. 03(화) 02:00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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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해상왕국 탐라에 대한 기록 몇을 적는다. 선덕여왕 시절 신라를 에워싼 9국의 위협을 불력으로 막고 이겨내기 위해 645년 지은 황룡사 9층 목탑 중 4층은, 탐라(탁라)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백제에 복속된 탐라의 호구는 8000, 활과 창 등 무기는 있으나 문기(文記)는 없다. 용삭원년(661년) 8월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당나라의 광동 앞바다에는 사자국(스리랑카)·대식국(아라비아)·유구국·임읍(베트남)·부남(태국)·진납(캄보디아)과 탐(부)라에서 온 배들로 가득차기도 했었다.
문기가 빈약한 탐라제주에서는 바다가 기록보다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 문헌에 없는 사건들도 바다는 전설로 건져 올리기에. 장보고와 탐라의 사이도 그러하다. 역사는 이 둘의 만남을 명확히 기록하지 않았으나, 전설의 기록은 남아있다. 서귀포시 화원동 법화사에는 최근 장보고 동상이 들어서고, 전남 완도에 건립된 장보고 기념관에도 장보고가 세운 사찰 중 하나로 탐라의 법화사가 소개되고 있음이 그러하다.
장보고는 통일신라시대 탐라의 세력이 미치는 탐진(지금의 강진 일대)에 세운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 동아시아의 해상을 주름잡던 해황(海皇)이다. 당나라와 일본 등의 교역 선들은 장보고의 보호 아래 바다를 오갔고, 바다는 이내 부와 문명을 나르는 길이 됐다. 이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에서 탐라는 바다의 요충지가 돼 세계와 이어져 있었다. 조선이 내린 출륙금지령(1629~1823) 전까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는 탐라가 토산물을 바친 신라와 교류한 기록이, 외부 세계와 접촉한 기록이 실려 있다. 대륙과 섬나라 사이에 문물의 교량을 건설케 하고, 바다의 위협으로부터 본토와 탐라를 지켜준 영웅 장보고. 필자는 장보고와 관련된 역사와 설화를 읽고 상상하며 다시 그를 떠올린다. 탐라의 육류, 전복, 해산물, 감류 등은 해상교역의 귀중한 자원이었다. 이런 물산이 청해진 등을 거쳐 당과 일본 등지로 흘러갔고, 그 항로의 중심에 탐라와 장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염장에 의해 841년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탐라는 1105년 고려에 편입되며 왕국의 이름을 잃었다.
장보고와 탐라의 이야기는 확정된 역사라기보다, 바다를 부유하고 부침하는 가능성의 역사다. 그 가능성 속에는 역사적 진실이 숨어있다. 탐라제주와 바다를 잇는 항로 위에서 사람과 물자를 실은 문화와 꿈들이 오갔고, 그 중심에 바다 품에 안기듯 해양을 편히 오가게 한 선인들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기록을 넘어서는 설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탐라제주의 바다는 단절의 경계였는가, 연결의 길이었는가. 장보고와 탐라는 이렇듯 기록 너머에서 파도를 타고 오늘의 제주 섬으로 건너오고 있다. 신라와 같은 왕국인 탐라와, 경주와 같은 고을인 제주는, 바다 건너 세월 건너 저편에서 밀려오며 탐라제주로 만나고 있고 또한 만나게 하고 있음이다.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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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통일신라시대 탐라의 세력이 미치는 탐진(지금의 강진 일대)에 세운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 동아시아의 해상을 주름잡던 해황(海皇)이다. 당나라와 일본 등의 교역 선들은 장보고의 보호 아래 바다를 오갔고, 바다는 이내 부와 문명을 나르는 길이 됐다. 이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에서 탐라는 바다의 요충지가 돼 세계와 이어져 있었다. 조선이 내린 출륙금지령(1629~1823) 전까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는 탐라가 토산물을 바친 신라와 교류한 기록이, 외부 세계와 접촉한 기록이 실려 있다. 대륙과 섬나라 사이에 문물의 교량을 건설케 하고, 바다의 위협으로부터 본토와 탐라를 지켜준 영웅 장보고. 필자는 장보고와 관련된 역사와 설화를 읽고 상상하며 다시 그를 떠올린다. 탐라의 육류, 전복, 해산물, 감류 등은 해상교역의 귀중한 자원이었다. 이런 물산이 청해진 등을 거쳐 당과 일본 등지로 흘러갔고, 그 항로의 중심에 탐라와 장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염장에 의해 841년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탐라는 1105년 고려에 편입되며 왕국의 이름을 잃었다.
장보고와 탐라의 이야기는 확정된 역사라기보다, 바다를 부유하고 부침하는 가능성의 역사다. 그 가능성 속에는 역사적 진실이 숨어있다. 탐라제주와 바다를 잇는 항로 위에서 사람과 물자를 실은 문화와 꿈들이 오갔고, 그 중심에 바다 품에 안기듯 해양을 편히 오가게 한 선인들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기록을 넘어서는 설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탐라제주의 바다는 단절의 경계였는가, 연결의 길이었는가. 장보고와 탐라는 이렇듯 기록 너머에서 파도를 타고 오늘의 제주 섬으로 건너오고 있다. 신라와 같은 왕국인 탐라와, 경주와 같은 고을인 제주는, 바다 건너 세월 건너 저편에서 밀려오며 탐라제주로 만나고 있고 또한 만나게 하고 있음이다.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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