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사람과 고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 가면 돼
입력 : 2025. 11. 03(월) 03:00수정 : 2025. 11. 03(월) 10:26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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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람과 고기'
[한라일보] 할 일도 만날 사람도 없는 토요일 오후, 지난 밤의 과음으로 점심 즈음 일어나 입에 뭔가를 집어 넣고 챙겨 먹어야 할 약들과 영양제들을 털어 넣고 전기 장판으로 달궈진 침대 위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읽던 책이 이불 속에 있어서 꺼내 들고 몇 장을 읽다가 환기를 해야지 싶어 창문을 열었더니 따뜻한 가을 오후의 햇살과 재채기가 날 정도로 성큼 차가워진 바람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이러다가 하루 종일 이 침대 위에 있겠구나, 이 좋고 짧은 가을을 놓치는 건 아깝고 아깝다 생각하며 끙 하고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떨어진 원두를 사고 뭘 해야 할까 생각을 하다 디지털 만보기 포인트라도 채우자 싶어 덜렁덜렁 동네를 걸었다. 그러다 자주 가던 서점으로 자연스레 향했다. 휴일의 대형 서점은 인산인해여서 통로마다 어깨를 좁혀야 했는데 갑자기 정체구간이 생겼다. 뭐지 하고 두리번 거리니 걸음이 느린 어르신 한 분이 매대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책들을 구경하고 계셨다.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이셨고 시력이 썩 좋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다. 연인과 가족들이 잰 걸음으로 어떻게든 막힌 길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자 나와 어르신 사이에 틈이 생겼다. 어르신은 혼자 오신 듯 했고 이 공간과 익숙해 보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속도가 달랐다. 나는 어쩐지 가까운 내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열린 길 위에 멈추어 섰다. 반갑고 쓸쓸한 맞닥뜨림이 마음에 새겨졌다.
<사람과 고기>는 어쩌다 마주친 노년 삼인조의 무전취식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두 독거노인 남성 형준(박근형)과 우식(장용)은 길가에 버려진 폐지를 두고 싸움을 벌이다 안면을 트게 되고 그 싸움판의 곁에서 채소를 팔던 화진(예수정)과도 만나게 된다. 세 노인 모두 혼자 살고 있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인 데다가 딱히 어디에도 소속된 이들이 아니다. 형준과 우식의 화해는 소고기뭇국을 형준의 집에서 끓여 먹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 자리에 화진도 합류해 서투른 남자들 대신 요리를 해주게 되고 이날을 기점으로 세 사람은 '고기 모임'의 동지가 된다. 고기를 사겠다고 한 우식이 제안한 방법은 먹고 튀는 것, 즉 무전취식이다. 형준과 화진은 어이없는 우식의 제안에 손사래를 치지만 이내 이 짜릿한 도발에 합류한다. 삼인조에게도 규칙은 있다. 고기는 각 일 인분 씩, 소주는 한 병만, 비싼 고기는 먹지 않고 무전취식을 하는 식당은 장사가 잘 되는 곳이어야 한다. 이 규칙을 따라 세 사람의 일탈이 이어진다. 혼자서는 먹기 힘든 구워 먹는 고기를 셋이 함께 먹고 혼자일 때는 일터이기만 했던 도시의 곳곳을 셋이 함께 누빈다. 그들은 함께 고기를 먹고 돈 내지 않고 도망치는 포식과 일탈 속에서 살아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배가 부르고 웃음이 나온다. 범죄의 구성원들은 그렇게 예기치 못한 생의 활력으로 범죄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사람과 고기>는 우리 사회 속 노년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으나 저속노화가 트렌드가 되고 동안 열풍이 식지 않는 대한민국의 한복판 그 바로 옆에 살고 있는 나이 든 이들의 얼굴을 영화는 찬찬히 들여다 본다. 쇠약한 육체와 부족한 경제력,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 노인들이 기대는 것은 국가나 가족이 아닌 같은 모양을 한 서로의 어깨다. 알아본다는 것은 알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해서 이 세 사람이 서로가 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고기를 먹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노인들은 분명 범죄자지만 이들이 받아야 할 것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벌이지 천벌이나 비아냥과 욕설이 아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이 던지는 자조적인 농담이 영화에서는 노래처럼 흐른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살 맛이 난다고, 사는 것 같다고,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흥얼거리는 세 사람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서 나는 마음에서 즙이 흐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인생에 훈수를 두는 일이 쉬운 세상이다. 익명의 댓글들로 타인을 흉보고 평가하는 일이, 모든 것에 점수를 매기고 줄을 세우는 일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가난한 노인들의 무전취식 범죄는 아마도 '저렇게 늙으면 안된다'는 반면교사의 뉴스로 쉬이 쓰일 텐데 이 영화는 이슈의 속살을 더듬고자 시간과 마음을 쓰는 쪽을 택한다. 언젠가부터 버릇처럼 쓰는 말들이 있다 '곱게 늙어야지'. <사람과 고기>를 보고 나서 이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혹시 내 생각 속에 거칠지 않고 모나지 않으며 피해를 끼치지도 걱정을 사지도 않는 노인이라는 환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한계 속에 누군가의 얼굴들을 가둬두고 평가했고 나와 타인의 미래를 당연한 공포로만 가둬둔 것이 아닐까. 극장을 나와서 이어폰을 끼고 비가 내린 가을 밤 거리를 걸었다. 굴러가는 낙엽에도 웃던 내가 이제는 젖은 낙엽 한 장도 조심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그때 귓속에 케이팝의 가사가 쟁쟁하게 울렸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 가면 돼'. 웃음이 났다. 영화가 하려던 말이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았다. 인생을 먹고 서로를 씹고 세상을 맛보고 지금을 즐길 앞으로의 순간들이 둥글게 떠올랐다. 늙고 낡음이 무언가와 비교해 평가절하할 필요가 없는 단어임을 기쁘게 몸소 체험하기로 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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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고기>는 우리 사회 속 노년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영화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으나 저속노화가 트렌드가 되고 동안 열풍이 식지 않는 대한민국의 한복판 그 바로 옆에 살고 있는 나이 든 이들의 얼굴을 영화는 찬찬히 들여다 본다. 쇠약한 육체와 부족한 경제력,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 노인들이 기대는 것은 국가나 가족이 아닌 같은 모양을 한 서로의 어깨다. 알아본다는 것은 알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해서 이 세 사람이 서로가 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고기를 먹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노인들은 분명 범죄자지만 이들이 받아야 할 것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벌이지 천벌이나 비아냥과 욕설이 아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이 던지는 자조적인 농담이 영화에서는 노래처럼 흐른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살 맛이 난다고, 사는 것 같다고,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흥얼거리는 세 사람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서 나는 마음에서 즙이 흐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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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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