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연의 문화광장] 사물 없는 예술: 티노 세갈이 설계한 '상황'의 힘
입력 : 2026. 03. 03(화) 00:00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한라일보] 2008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미술사에서 가장 기이한 거래 중 하나를 성사시켰다. 작품명 '키스'(2003). 약 7만달러에 달하는 금액이 지급됐지만, 미술관에 도착한 것은 캔버스도, 조각도, 심지어 서면 계약서 한 장조차 아니었다. 거래 일체는 변호사와 공증인 앞에서 오직 구두로만 체결됐으며, 어떠한 물질적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는 엄격한 조건이 따라붙었다. 이 전례 없는 소장의 주인공은 21세기 가장 급진적인 예술가 중 한 명, 티노 세갈이다.

세갈은 자신을 '퍼포먼스 아티스트'라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 대신 자신의 작업을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이라 명명한다. 그의 전시장에는 물성을 지닌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갈에 의해 훈련된 '인터프리터(재연자)'들이 관객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지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며 관계를 형성할 뿐이다. 작품은 관객이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시작돼, 나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정치경제학과 무용 등 그의 이력은 이 급진적 예술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세갈은 미술관을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의 '경제적 소우주'로 간주하고, 물질적 생산 없이도 가치가 창출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자원을 소모하지 않는 그의 작업 방식은 동시대 생태적 윤리와도 자연스레 맞닿아 있다. 2010년 구겐하임미술관의 비워진 나선형 복도를 걸어 올라가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세대별 인터프리터와 진보를 논했던 '진보(This Progress)'(2006)는 물질 과잉의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축적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되묻는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될 수 없다. 오직 목격한 이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이는 순간을 소유하고 박제하려는 현대인의 욕망에 대한 강력한 거부이기도 하다. 201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바닥에 앉아 허밍하고 비트박스를 하는 소수의 퍼포머들만으로 황금사자상(최고 작가상)을 거머쥐었을 때, 세계 미술계는 '사물 없는 예술'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2월 말부터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기 시작한 그의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 '티노 세갈 / 컬렉션'은 이미 미술계의 화제다.

물질적 화려함과 거대한 설치물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느끼게 하는 세갈의 상황은 어떤 파장을 일으킬까. 캔버스 너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떨림 속에 존재하는 그의 예술은 우리가 잃어버린 순간의 현존을 되찾아줄지도 모른다.

형태가 없기에 파괴될 수 없고, 소유할 수 없기에 모두의 것이 되는 예술. 세갈이 설계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물건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와 눈맞춤이라는 예술의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리움의 비워진 공간에서 펼쳐질 이 경험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나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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