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희의 하루를 시작하며] 이거? 최신 유행이야 - 지나가는 것들과 남아 있는 마음
입력 : 2026. 08. 12(수) 03:00수정 : 2026. 08. 12(수) 06:59
한상희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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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8남매가 부대끼는 집안의 등굣길은 늘 북새통이었다. 비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모아둔 양말을 나이 순서대로 챙겨 신다 보니, 막바지인 내 차례에 남은 건 색깔도 모양도 완전히 다른 짝짝이 양말 한 쌍뿐이었다.
ㅣ 짝짝이 양말 신어봤어?
빗길을 뚫고 짝짝이 양말을 신은 채 학교로 향했다. 어색함이 부끄러워 발끝을 살짝 웅크린 채 걸음을 옮겼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놀고 있을 때 눈썰미 좋은 친구 하나가 내 발끝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상희 너 양말 짝짝이 신었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이거? 최신 유행이야." 고개를 숙일 겨를도 없이 던져버린 한마디였다. 정적도 잠시, 아이들은 "진짜야?" 하며 킥킥거렸고, 해프닝은 그렇게 유쾌하게 흘러갔다.
일주일 뒤 제대로 짝을 맞춘 양말을 신고 등교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찾아온 친구들 발끝을 보는 순간 왈칵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정작 나는 제대로 제 짝을 찾아 신었는데, 아이들만 짝짝이 양말을 신은 채 멀뚱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물었다. "상희야, 왜 오늘 유행처럼 안 신었어?" 이번에는 짐짓 능청을 떨며 답했다. "아, 이거? 제주시 유행 끝났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와르르 터져 나왔다.
ㅣ 다 왔는지 봐라
사실 우리 집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내력을 나는 잘 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제주 4·3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겪었다. 마을이 불타고 가족을 잃은 폐허 위에서 모진 세월을 견뎠다. 어머니는 그 깊은 아픔을 딛고 다시 삶을 일구며 우리 8남매를 낳아 키우셨다. 식구들을 거두느라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도 아이들 숫자를 일일이 세는 대신 그저 툭 한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다 왔는지 봐라." 모든 것을 잃었던 세상에서 자식들이 무사히 한자리에 둘러앉는 것. 그것이 어머니가 그 거친 세월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식들을 지켜내는 것이 어머니가 세상을 이겨내는 방식이었다.
어머니가 보여준 삶의 단단함 때문이었을까. 내게 짝짝이 양말 한 짝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오늘 비가 오면 내일은 맑겠지, 날이 밝으면 내일은 제 짝 양말을 신으면 되지.' 그런 담담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가난이 아픔이 아닌 따뜻한 추억의 온기로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ㅣ 잠시 머무는 유행처럼
생각해 보면 유행(流行)이란 한자 그대로 '흘러서(流) 지나가는(行) 것'이다. 옷차림이나 눈에 보이는 물건들만 유행이 되는 게 아니다. 살다 보면 불쑥 찾아오는 짝짝이 양말 같은 난감함이나 뜻밖의 결핍, 서러운 슬픔과 상처마저도 결국은 잠시 머물다 흘러가는 유행일 뿐이다. 훗날 삶의 여정에서 또다시 까다롭고 휘청이는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그 시절 복도에서 그랬듯 마음속으로 툭 던지며 조용히 웃어보려 한다. "뭐 어때, 이것도 그저 흘러가는 유행인걸." <한상희 서귀포중학교 교장·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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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짝짝이 양말 신어봤어?
빗길을 뚫고 짝짝이 양말을 신은 채 학교로 향했다. 어색함이 부끄러워 발끝을 살짝 웅크린 채 걸음을 옮겼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놀고 있을 때 눈썰미 좋은 친구 하나가 내 발끝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상희 너 양말 짝짝이 신었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이거? 최신 유행이야." 고개를 숙일 겨를도 없이 던져버린 한마디였다. 정적도 잠시, 아이들은 "진짜야?" 하며 킥킥거렸고, 해프닝은 그렇게 유쾌하게 흘러갔다.
일주일 뒤 제대로 짝을 맞춘 양말을 신고 등교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찾아온 친구들 발끝을 보는 순간 왈칵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정작 나는 제대로 제 짝을 찾아 신었는데, 아이들만 짝짝이 양말을 신은 채 멀뚱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물었다. "상희야, 왜 오늘 유행처럼 안 신었어?" 이번에는 짐짓 능청을 떨며 답했다. "아, 이거? 제주시 유행 끝났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와르르 터져 나왔다.
ㅣ 다 왔는지 봐라
사실 우리 집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내력을 나는 잘 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제주 4·3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겪었다. 마을이 불타고 가족을 잃은 폐허 위에서 모진 세월을 견뎠다. 어머니는 그 깊은 아픔을 딛고 다시 삶을 일구며 우리 8남매를 낳아 키우셨다. 식구들을 거두느라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도 아이들 숫자를 일일이 세는 대신 그저 툭 한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다 왔는지 봐라." 모든 것을 잃었던 세상에서 자식들이 무사히 한자리에 둘러앉는 것. 그것이 어머니가 그 거친 세월을 버티게 해 준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식들을 지켜내는 것이 어머니가 세상을 이겨내는 방식이었다.
어머니가 보여준 삶의 단단함 때문이었을까. 내게 짝짝이 양말 한 짝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오늘 비가 오면 내일은 맑겠지, 날이 밝으면 내일은 제 짝 양말을 신으면 되지.' 그런 담담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가난이 아픔이 아닌 따뜻한 추억의 온기로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ㅣ 잠시 머무는 유행처럼
생각해 보면 유행(流行)이란 한자 그대로 '흘러서(流) 지나가는(行) 것'이다. 옷차림이나 눈에 보이는 물건들만 유행이 되는 게 아니다. 살다 보면 불쑥 찾아오는 짝짝이 양말 같은 난감함이나 뜻밖의 결핍, 서러운 슬픔과 상처마저도 결국은 잠시 머물다 흘러가는 유행일 뿐이다. 훗날 삶의 여정에서 또다시 까다롭고 휘청이는 순간이 찾아오면, 나는 그 시절 복도에서 그랬듯 마음속으로 툭 던지며 조용히 웃어보려 한다. "뭐 어때, 이것도 그저 흘러가는 유행인걸." <한상희 서귀포중학교 교장·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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