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과거의 기록
입력 : 2014. 04. 16(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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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왕조별로 편찬돼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 수차례 걸친 우리나라 고난의 역사속에서도 유실 변형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현재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500년이라는 세월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례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 왕조의 기록들이 남아있지만 기록의 양이나 기간 등에서 우리나라 실록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실록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이후 정종을 거쳐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에 의해 최초로 편찬됐다. 이후부터는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임시기관인 '실록청'이 마련돼 편찬이 이뤄졌다. 선대왕의 기록인 셈이다.
실록의 기초자료가 되는 사초는 대체로 전도유망한 젊은 관리들에 의해 왕이 참석하는 행사에서의 왕의 언행이나 신하들의 의견 등을 비롯 각 지방에서 벌어지는 일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담겨져 실록편찬시 사용되고 물에 씻겨져 없애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특히 왕을 비롯한 그 누구도 사초 작성과 실록 편찬과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었다. 간혹 이러한 원칙들이 왕이나 신하 등에 의해 깨지는 경우가 발생할 때는 큰 필화로 번져 많은 이들이 숙청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우리 선조들은 왜 실록을 남겼을까.
얼마전 실록을 10여년의 긴 세월을 거쳐 20권의 만화로 그려낸 제주출신 박시백 화백은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고 할만큼 기록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느낄 수 있었다"며 "실록을 남김으로 인해 왕도 신하도 후세의 비난을 우려해 전횡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스스로의 견제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또 박 화백은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시골의 한 유생이 왕의 행위중 중차대한 문제에 상소를 올리면 왕조차도 이를 무시하지 못하고 공론에 부쳐 논의하고 잘못을 바로잡거나 이에 대한 답을 내려줘야 했다"며 "어찌보면 지금의 상황보다 더 언론에 대한 자유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어 박 화백은 "조선시대 선대왕때 편찬된 실록도 후대의 왕들이 보거나 고치는 일은 삼갔다"며 "조선왕조실록은 아마 이씨 왕조가 끝난 후의 세대들을 위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실제 실록은 역사적 사실 기록과 곡필 방지를 위한 노력들 속에 편찬됐고, 편찬 후에는 500년이라는 세월동안 기록보존을 위해 습기와 벌레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와 함께 전국의 깊고 높은 산속 등 4곳 사고로 보내져 임진왜란 등의 국가대란에도 유실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에도 나라의 장관이 임명되거나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될 때는 어김없이 과거 행적에 대한 논란이 제기된다. 이로 인해 임명 직전 낙마하는 장관 후보가 생겨나고 치솟던 지지율이 곤두박질 치는 후보도 볼 수 있다. <김치훈 정치경제부장>
실록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이후 정종을 거쳐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에 의해 최초로 편찬됐다. 이후부터는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임시기관인 '실록청'이 마련돼 편찬이 이뤄졌다. 선대왕의 기록인 셈이다.
실록의 기초자료가 되는 사초는 대체로 전도유망한 젊은 관리들에 의해 왕이 참석하는 행사에서의 왕의 언행이나 신하들의 의견 등을 비롯 각 지방에서 벌어지는 일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담겨져 실록편찬시 사용되고 물에 씻겨져 없애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특히 왕을 비롯한 그 누구도 사초 작성과 실록 편찬과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었다. 간혹 이러한 원칙들이 왕이나 신하 등에 의해 깨지는 경우가 발생할 때는 큰 필화로 번져 많은 이들이 숙청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우리 선조들은 왜 실록을 남겼을까.
얼마전 실록을 10여년의 긴 세월을 거쳐 20권의 만화로 그려낸 제주출신 박시백 화백은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고 할만큼 기록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느낄 수 있었다"며 "실록을 남김으로 인해 왕도 신하도 후세의 비난을 우려해 전횡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스스로의 견제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또 박 화백은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시골의 한 유생이 왕의 행위중 중차대한 문제에 상소를 올리면 왕조차도 이를 무시하지 못하고 공론에 부쳐 논의하고 잘못을 바로잡거나 이에 대한 답을 내려줘야 했다"며 "어찌보면 지금의 상황보다 더 언론에 대한 자유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어 박 화백은 "조선시대 선대왕때 편찬된 실록도 후대의 왕들이 보거나 고치는 일은 삼갔다"며 "조선왕조실록은 아마 이씨 왕조가 끝난 후의 세대들을 위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실제 실록은 역사적 사실 기록과 곡필 방지를 위한 노력들 속에 편찬됐고, 편찬 후에는 500년이라는 세월동안 기록보존을 위해 습기와 벌레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와 함께 전국의 깊고 높은 산속 등 4곳 사고로 보내져 임진왜란 등의 국가대란에도 유실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에도 나라의 장관이 임명되거나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될 때는 어김없이 과거 행적에 대한 논란이 제기된다. 이로 인해 임명 직전 낙마하는 장관 후보가 생겨나고 치솟던 지지율이 곤두박질 치는 후보도 볼 수 있다. <김치훈 정치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