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8)애월읍 납읍리
입력 : 2014. 09. 23(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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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애월읍 납읍마을 전경(사진 위)과 난대식물의 보고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납읍 금산공원(사진 아래)
사학의 중심·선비의 마을이란 문화적 자긍심 지닌 마을
많은 훈장·서당으로 사학의 중심지로 유명세
천연기념물 금산공원엔 난대식물 200여종 서식
마을의 신전과도 같은 곳…남성 주관하는 마을제 올려
납읍초 분교 위기 처하자 마을주민·출향인사 성금 모아
연립주택 지어 무상입주 지원
원래 옛 이름은 과납(科納)이다. 700년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 과오름 남쪽에 위치하여 평온함이 가득하다. 일제 강점기에 명칭이 납읍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邑(고을 읍)자가 들어간 마을은 성읍리와 납읍리 뿐이다. 김태수(72) 노인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애월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에서 고을읍자를 고집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의식은 조선 중기 이후 중앙무대에서 20여명의 과거급제자가 속출함에 따라 문촌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던 영광과 무관하지 않다. 많은 훈장들과 서당이 있어서 사학의 중심지였던 과납. 학문을 연마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던 역사를 가진 납읍리는 그 후손들 또한 공직자들이 유난히 많다.
천연기념물 375호로 지정된 금산공원은 4만3000㎡(1만3000평)에 이르는 면적에 난대식물 200여 종이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이다. 자연림 속을 걷다 보면 그 옛날 인상정에서 선비들이 시를 읊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숲은 마을의 신전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포제청이라고 하는 기와집이 있어서 그 곳에서 남성들이 주관하는 유교의식으로 마을제를 올린다. 그 원형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 제주도 무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어 내려오고 있다.
선비의 마을이라 지칭되던 납읍리가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농촌인구 감소로 인하여 납읍초등학교가 분교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봉착해서였다. 1998년 마을주민들을 비롯한 출향인사들이 선비마을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내놓은 해법은 놀라웠다. 마을 성금을 모아서 연립주택을 지어 초등학교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 무상으로 입주를 시켜주겠다는 제안이 그것이다. 마을주민들이 일심 단결하여 실천에 옮긴 결과 납읍초등학교는 지금까지 건재하다. 지금까지 총 3차에 걸쳐서 56가구를 건설하여 초등학교 살리기에 나서는 모습은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문화적 자긍심은 어떤 경제적 요인도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공적 사례라고 해야겠다. 감동적인 것은 이 사업에 단 한 푼의 행정지원도 없이 납읍리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의 성금에 의해서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양반고을이라는 주민 자긍심은 납읍리를 관통하는 문화이며, 하나의 가치기준으로 느껴졌다. 천민자본주의에 찌든 도시인들이 있다면 납읍리 주민들의 정신세계 속에 젖어들어 볼 필요가 있다. 남에 베푸는 것을 인생의 품격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마을이기에 이웃 간에 정이 넘치고 정신적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도시 태생으로 납읍리 청년을 만나 시집 온 지 8년이 되었다는 두 아이의 엄마 김정아씨는 "이웃의 모자란 것을 채워주는 분들이 사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의식 수준이 농촌보다 도시가 높을 것이라는 오만은 납읍리에서 호된 질책을 당하게 된다.
납읍리 주민들의 깊이 있는 결속력은 멀리 보고 뚜벅뚜벅 실천해가는 것이라 하겠다. 1917년부터 시작하여 23년에 걸친 주민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사장물이라는 둥근 형태의 식수천을 만들어냈던 토목의 역사. 경거망동하지 아니하고 진득하게 꿈을 실현해가는 전통을 여기서 발견하였다. 마을공동체의 일을 자신의 일이라 여기던 시대가 아직도 납읍리에서는 끝나지 않았다. 젊은이의 감소가 마을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 경험한 관계로 진취적인 마인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김경호 이장의 숙원은 시종일관 마을농로 확장이었다. 그래야 주거여건이 마련돼서 유입인구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화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부합하는 형태로 농촌을 리모델링하고 싶은 욕구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 농로길을 방문객의 입장에서 걷는 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제주의 정취를 즐기는 것이 되지만 마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일정량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리라. 문제 해결은 절묘한 조화의 지점을 설정하는 일이다. 지혜는 공동체의 이익 속에 숨어 있다. 개발의 방향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이 아름다운 마을에 드리워져 있었다.
꿈은 야무졌다. 인구 유입을 겨냥하고 있는 꿈들이 뭉개구름처럼 피어나는 마을이다. 김보길 개발위원장은 경남 등지에서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고서 귀향하였기 때문에 더욱 진취적이었다. 다른 마을의 관광자원과 연계하여 마을발전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로 묶여 있지 않은 소금산 1만㎡(3000여평)을 개발하여 관광자원화해야 한다고 했다. 젊은 부부들이 일자리가 될 수 있는 오염과 공해가 없는 산업을 유치하여 농촌경제와 양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납읍리 며느리인 김정아씨가 가장 시급하게 이루고 싶은 꿈이 다목적회관이라고 밝히는 이유는 극명했다.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그 어떤 발전 전략보다 우선하여야 한다는 시급성에서 나온 것이기에.
애월읍은 제주시와 접하여 있다. 그래서 그런지 30년 뒤에 납읍리의 변화상에 대한 대답의 대부분이 도시생활을 하는 도민들의 주거공간으로 탈바꿈되는 것이었다. 대도시의 베드타운이 인접 농촌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교통 여건이 시간적 요인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도로확장에 대한 염원이 짙게 배어있는 납읍리의 꿈들. 농촌마을의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야 하는 욕심꾸러기 전략가들이 살고 있었다. 출중한 인재를 배출한 납읍리의 저력을 믿고 있는 것은 인적자원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
앞으로 30년, 납읍리는 변화의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지나간 30년보다 변화의 폭은 더 넓고 클 것이다. 지금 꿈꾸고 있는 것들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기를 바라면서 함축적으로 내놓은 것이 있었다. 기필코 납읍중학교와 과납고등학교가 있을 것이다. 분교가 되는 것을 막아낸 저력은 양반마을의 자긍심에서 왔다면 그 명예를 잃지 않고 발전의 초석으로 삼아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다시 과오름 중턱에서 납읍리를 바라본다. 풍수지리를 알았던 선비들이 닭이 알을 품은 형태라고 했다는 마을. 포근하다.
<공공미술가>
많은 훈장·서당으로 사학의 중심지로 유명세
천연기념물 금산공원엔 난대식물 200여종 서식
마을의 신전과도 같은 곳…남성 주관하는 마을제 올려
납읍초 분교 위기 처하자 마을주민·출향인사 성금 모아
연립주택 지어 무상입주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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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납읍리장 |
선비의 마을이라 지칭되던 납읍리가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농촌인구 감소로 인하여 납읍초등학교가 분교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봉착해서였다. 1998년 마을주민들을 비롯한 출향인사들이 선비마을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내놓은 해법은 놀라웠다. 마을 성금을 모아서 연립주택을 지어 초등학교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 무상으로 입주를 시켜주겠다는 제안이 그것이다. 마을주민들이 일심 단결하여 실천에 옮긴 결과 납읍초등학교는 지금까지 건재하다. 지금까지 총 3차에 걸쳐서 56가구를 건설하여 초등학교 살리기에 나서는 모습은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문화적 자긍심은 어떤 경제적 요인도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공적 사례라고 해야겠다. 감동적인 것은 이 사업에 단 한 푼의 행정지원도 없이 납읍리 주민들과 출향인사들의 성금에 의해서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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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교 위기에 처한 납읍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을주민과 출향 인사들이 성금을 모아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 무상 지원하기 위해 지은 연립주택 |
납읍리 주민들의 깊이 있는 결속력은 멀리 보고 뚜벅뚜벅 실천해가는 것이라 하겠다. 1917년부터 시작하여 23년에 걸친 주민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사장물이라는 둥근 형태의 식수천을 만들어냈던 토목의 역사. 경거망동하지 아니하고 진득하게 꿈을 실현해가는 전통을 여기서 발견하였다. 마을공동체의 일을 자신의 일이라 여기던 시대가 아직도 납읍리에서는 끝나지 않았다. 젊은이의 감소가 마을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 경험한 관계로 진취적인 마인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김경호 이장의 숙원은 시종일관 마을농로 확장이었다. 그래야 주거여건이 마련돼서 유입인구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화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부합하는 형태로 농촌을 리모델링하고 싶은 욕구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 농로길을 방문객의 입장에서 걷는 것은 아직도 남아있는 제주의 정취를 즐기는 것이 되지만 마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일정량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리라. 문제 해결은 절묘한 조화의 지점을 설정하는 일이다. 지혜는 공동체의 이익 속에 숨어 있다. 개발의 방향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이 아름다운 마을에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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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주관해 마을제를 지내는 금산공원 내 포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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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안길 |
애월읍은 제주시와 접하여 있다. 그래서 그런지 30년 뒤에 납읍리의 변화상에 대한 대답의 대부분이 도시생활을 하는 도민들의 주거공간으로 탈바꿈되는 것이었다. 대도시의 베드타운이 인접 농촌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교통 여건이 시간적 요인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도로확장에 대한 염원이 짙게 배어있는 납읍리의 꿈들. 농촌마을의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야 하는 욕심꾸러기 전략가들이 살고 있었다. 출중한 인재를 배출한 납읍리의 저력을 믿고 있는 것은 인적자원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
앞으로 30년, 납읍리는 변화의 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지나간 30년보다 변화의 폭은 더 넓고 클 것이다. 지금 꿈꾸고 있는 것들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기를 바라면서 함축적으로 내놓은 것이 있었다. 기필코 납읍중학교와 과납고등학교가 있을 것이다. 분교가 되는 것을 막아낸 저력은 양반마을의 자긍심에서 왔다면 그 명예를 잃지 않고 발전의 초석으로 삼아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다시 과오름 중턱에서 납읍리를 바라본다. 풍수지리를 알았던 선비들이 닭이 알을 품은 형태라고 했다는 마을. 포근하다.
<공공미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