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약속의 장소
입력 : 2023. 03. 24(금) 00:00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한라일보] 슬픔에 대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생에는 자주, 덜컥 슬픔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슬픔의 방문을 막을 도리는 없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도, 방 안에 웅크리고 슬픔을 외면하려 해도 찾아온 슬픔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때로는 고통과 괴로움을 동반하기도 하는 그 복잡하고 거대한 슬픔에 대해 우리는 더 잘 알아야 한다. 그렇게 슬픔을 알고 안고 슬픔과 내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은 폐허가 된 누군가의 언젠가를 재건하는 일이 된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를 통해 자국인 일본은 물론 국내 관객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간곡한 편지 와도 같은 작품이다. 무너지고 버려진 것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건네고자 이 영화는 한 장면, 한 장면을 소원을 비는 돌탑을 만들 듯 공들여 쌓아간다. 무엇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울면서도 달리는 영화다. 슬픔을 품에 꼭 끌어안고 세상의 끝을 향해 뛰어가는 주인공들을 보며 이 작품의 미션이 가진 무게에 대해 또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규슈에 살고 있는 소녀 스즈메는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고향에서 재난이 시작되는 문과 그 문을 막기 위해 가문 대대로 애써온 남자 소타와 맞닥뜨리게 된다. 규슈를 시작으로 일본 각지의 폐허에서 재난을 일으키는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다리가 세 개 뿐인 의자로 변해버린 소타와 함께 스즈메는 재난을 막기 위한 숨가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영화는 장르적 쾌감을 짜릿하게 전해주는 오프닝 씬과 이 위대한 여정의 마침표를 뭉클하게 찍는 엔딩 씬에 이르기까지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서정적인 영상,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함께 촘촘하고 매끄럽게 진행된다. 일본 전역을 아우르는 로드 무비인 동시에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화이자 감동적인 가족 영화 그리고 청춘 로맨스 영화의 싱그러운 질감까지 모두 보여주는 이 작품은 전세계적 성공을 거둔 신카이 마코토의 대표작 [너의 이름은] 이후 그의 스펙터클이 어디까지 진화 했는지를 보여주는 재난 블럭버스터이기도 하다.

또한 재난 블럭버스터라는 기묘한 뉘앙스의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 작품은 결국 영화라는 매체가 재난을 대하는 태도 까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거대한 재난의 폐해를 목격하는 관객의 안전한 카타르시스가 과연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되고 마는 것이 옳은 것이지를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을 통해 묻고 있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어떤 측면에서는 신카이 마코토의 이전 작품들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도전적인 질문을 건네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수많은 재난 블럭버스터들이 재난에 맞닥뜨린 이들에게서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심리와 인간성의 실체에 대한 탐구를 해왔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수성을 십분 활용에 인간에게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영역 까지를 기필코 넘어서는 작품이다.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재난을 인간의 힘으로 막아내는 것. 폐허 위에 새겨진 생의 순간들을 위무하고 간절한 기도와 지치지 않는 사랑을 통해 불가해한 모든 것들을 납득시키는 것. 그렇게 폐허가 된 곳들과 마음들을 약속의 장소로 바꾸고 가꾸는 것. 신카이 마코토는 닫힌 문의 저편을 열어 닿을 수 없는 순간까지도 펼쳐내려 하는 필사의 용기를 이렇게 영화에 새긴다.

그의 용기는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예술에 대한 오랜 사랑과 재난이라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들을 향한 깊은 애정이 [스즈메의 문단속]의 씨앗이 되었음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2004년 제작된 그의 첫 번째 장편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이후 신카이 마코토가 '잊지 못할 서정적 이미지의 제시'라는 스스로의 시그니처에서 얼만큼 멀리까지 나아 왔는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아마도 첫 장편이 꿈 꿔왔던 많은 걸 이뤄낸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문의 저편을 열어낸 그의 용기가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의 극장을 약속의 장소로 만들고 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548 왼쪽숫자 입력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한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