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타오르는 마음의 초상
입력 : 2023. 09. 22(금) 00:00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영화 '어파이어'.
[한라일보] 열불이 난다. 화가 도진다. 마음이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게 다 꺼내어 볼 수 없는 나의 마음 때문이다. 속에서 연신 뜨거운 것이 느껴지는데 만질 수도 없고 사진을 찍어 들여다볼 수도 없다. 내 속엔 대체 뭐가 있길래.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신작 '어파이어'는 이 통제불가능한 마음의 불에 대한 영화다. 바삭하게 말라가고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여름의 해변을 배경으로 네 남녀가 숲 속 별장에 모인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각기 다른 마음들이 마주치고 뒤엉킬 때 멀지 않은 곳에서는 산불이 번져오고 있다.

 애정과 열정 모두 뜨거운 기운을 품고 있다. 순식간에 불이 붙고 좀처럼 식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진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떤 감정들은 바람에 흔들리다 꺼지기도 하지만 진짜의 감정 앞에 바람은 부채질이 된다. 활활 타오른다. 어디까지 갈지 누구도 짐작도 못할 정도로. '어파이어'의 주인공은 마감을 앞둔 작가다. 글쓰기는 모두가 알다시피 누가 도와준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작가들이 마감을 앞두고 호텔방이나 산사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는 이유는 내 안의 불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오직 나와 내가 합의를 볼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일. 타인에 흔들리지 않고 내 안의 불을 잘 다독여 도자기처럼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일. '어파이어'의 레온 역시 그 일로 침착하지 못하다. 코 앞의 해변을 즐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쓰는 일 또한 수월하게 진행되지도 않는다. 마음이 불안하니 표정은 어둡고 나에 대해 너그럽지 못하다 보니 타인에게 친절할 리도 만무하다. 매일 바다로 향하는 해맑은 친구 펠릭스는 태평한 한량으로 보이고 예상하지 못하게 별장의 동거인이 된 여자 나디아가 밤마다 남자와 만들어내는 교성은 어이없고 불쾌하기 그지없다. 나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인데 도대체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레온의 투정은 분노가 되고 타인의 모든 행동과 말들이 거슬릴 뿐이다. 남 탓이 시작되자 쓰는 일은 더 미궁에 빠진다. 한밤의 소음으로만 접하던 나디아를 실물로 마주치게 되자 레온에게는 더 큰일이 발생한다. 쾌활하고 매력적인 나디아가 버석하게 말라버린 레온의 가슴에 예상하지 못한 불을 지핀 것이다.

 '어파이어'는 흥미로운 부조리극이다. 속물적인 레온을 비롯해 자기 앞의 생에 충실한 다른 인물들인 펠릭스와 나디아가 뒤엉키며 인간 군상들의 말간 속내와 그렇지 못해 일그러지는 표정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최근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나는 솔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10명의 남녀가 일주일 간 펜션에 모여 생활하며 서로의 짝을 찾는 단조로운 포맷의 이 예능 프로그램은 오로지 캐릭터로 승부하는 콘텐츠다. 누가 대신 써줄 수 없는 개인의 서사와 그 뒤엉킴이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다. 유독 인기를 끌고 있는 16기 '나는 솔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인간 군상들의 대립으로 그동안 관심 없던 시청자 층까지 흡수하고 있다. 타인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 강 건너 불구경에 흠뻑 취하는 것처럼 위험하고 불온하고 안전한 재미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을 못 견디게 궁금해한다는 것. 이 프로그램의 매력은 이 허락된 감정의 오지랖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파이어'의 레온이 '나는 솔로'에 나온다면 어땠을까. 자기에 취한 자기소개, 매력적이지 못한 외모와 떨어지는 사회성까지 그는 짝을 찾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레온은 솔직하지 못하다. 불 붙일 순간을 놓치는 이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이는 늘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한다. '어파이어'는 이 안쓰럽지만 사랑스럽지 않은 남자의 최종 선택에 그래도 자비를 허하는 영화다. 번져오는 산불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이들은 일순간 비극을 맞고 불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모든 것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다. 아름답던 숲 속 별장 위로는 눈과 같은 재가 날리고 사랑도 미움도 불의 열기가 만들어낸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 레온은 모든 것이 다 타고 난 뒤에야 남은 것을 그제야 똑바로 본다. 다 타고 남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마음에 품은 불의 정체를 깨닫는 레온, 그러자 뜨겁던 것이 다시 조금씩 식어간다. 차가워지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게.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고 안아주게 된 소중한 감정이 그에게 남았다. 축복이 아닐 리 없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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