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 전하는 우편물처럼… "새해엔 좋은 소식만.."
입력 : 2023. 01. 01(일) 13:36
김지은기자 jieun@ihalla.com
[당신의 삶이 이야기입니다] ⑤ 박제찬·고명석 집배원
수많은 우편물 속 '기쁜 소식' 드물지만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배달 온기 여전
[한라일보] 매일 같이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마주쳤을지 모르는 '집배원'이다. 세월이 흘러 우편물의 종류는 크게 바뀌었지만 손에서 손으로 건네는 배달에는 여전히 온기가 돈다. 제주지방우정청 집배원 박제찬(57), 고명석(48) 씨를 만났다. 이들이 고이 전하는 소식처럼 2023년 새해에는 모두에게 좋은 일이 깃들길 바란다.

힘들던 그때… 자정 근무·새벽 출근도 일상

딱 3년만 하자고 시작한 일이 31년이 넘었다. 서귀포우체국 집배실장인 박제찬 씨가 1991년 첫 직장으로 집배 일을 택한 건 '사람'이 좋아서였다. "사람을 알아가는 걸 재미로 생각했다"는 박 씨는 그동안 수많은 배달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해 왔다.

제주우편집중국 집배3팀장인 고명석 씨는 고향 선배의 소개로 우체국에 발을 들였다. 군대를 제대한 뒤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기였다. 제주우편집중국이 제주우체국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인 1998년부터 집배원으로 근무했다. 하루하루 버틴 게 1년이 되고 그런 해가 쌓여 벌써 24년이 넘었다.

서귀포우체국 집배실장 박제찬 집배원. 박 씨는 31년 넘게 집배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제주우편집중국 집배3팀장인 고명석 집배원. 1998년부터 집배원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땐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온 뒤로 그만 두고 간 사람이 40~50명은 될 겁니다. 많이 버텨야 두세 달이었어요. 거의 다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박제찬 씨의 말처럼 고된 시절이었다. 고명석 씨는 장난 섞인 말로 "젊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세월이 꽤 지난 뒤에 떠올려도 힘들었던 기억이다.

지금에야 집배원이 맡은 지역, 구역별로 우편물이 자동 분류되지만 집배순로구분기가 도입(전국 첫 2007년)되기 전만 해도 모두 집배원의 일이었다. 우편물이 몰리는 시기엔 밤 깊은 자정까지 우편물을 일일이 정리해야 했다. 다음날 늦지 않게 배달에 나서기 위해서였다. 새벽 출근도 일상이었다.

"예전엔 하루 배달을 다 하고 들어와도 심적 압박감이 컸어요. 다음 날 배달할 우편물을 수작업으로 분류해 놔야 했으니까요. 오후 3시 30분쯤 배달을 마치고 우체국에 들어와도 퇴근은 빨라야 오후 8시, 늦을 땐 자정을 넘겼습니다. 가정생활을 못할 정도였어요. 집에 들어가도 밥 먹고 잠만 자고 다시 나와야 했으니까요." 고 씨가 말했다.

'88오토바이'로 배달… 도면 들고 주소 찾던 기억 생생

지금처럼 어디에나 평탄한 길이 뚫리고 도시가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배달도 쉽지 않았다. 자전거 우편배달이 남아있던 1990년대 초에 일을 시작한 박 씨는 운 좋게 '88오토바이'를 타게 됐지만 언덕바지에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가파른 곳에선 힘을 못 쓰는 오토바이를 밀고 올라가야 했던 일이 아직도 선명하다.

박 씨는 "그때는 배달 범위도 넓었다. 서귀포 동홍동에서 시작해 토평동과 상효동, 보목동까지 들어가기도 했다"며 "한 번 배달에 나가면 하루에 두 번 기름을 넣어야 했다"고 말했다.

도면을 들고 배달을 다니던 기억도 있다. 서귀포시 신시가지가 커지기 전부터 대륜동 지역의 배달을 맡았던 박 씨는, 도시는 급속도로 커지는데 배달인력이 충원되지 않던 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했다.

"일단 집터만 잡히면 우편물이 오기 시작합니다. 집도 생기지 않은 데다 주소도 표시가 되지 않으니 도면을 보고 우편배달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럼 시청에 가서 도면을 떼고 그걸 보면서 배달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배달지를 찾아도 우편함이 없으니 (우편물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돌멩이로 눌러놓고 오기도 했지요."

고명석 집배원이 지난달 15일 제주우편집중국 집배순로구분기에서 배달 구역별로 자동 분류된 우편물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우편집중국 집배실 한편에 놓여 있는 우편물. 집배순로구분기로 분류할 수 없는 규격 외 우편물은 여전히 집배원들이 수작업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전보다 집배 환경이 크게 나아졌다지만 집배원의 하루는 여전히 바쁘다. 순로구분기로 분류되지 않는, 규격이 큰 우편물은 지금도 수작업으로 정리해야 하고 집배원 한 명이 하루에 배달하는 곳이 1000여 가구나 된다. 제주시 삼도·용담동 일부 구역의 배달을 맡는 고 씨가 하루에 방문하는 집만 해도 1200~1300가구. 담당 구역에 있는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을 매일 같이 도는 셈이다.

오토바이가 아닌 차량을 이용하는 우편배달도 하루 이동거리가 만만치 않다. 한라산 영실처럼 오토바이로 배달하기 어려운 서귀포 산간 지역의 배달을 맡는 박 씨는 하루에 기본 100㎞가 넘는 거리를 달린다. 그는 "오늘 같은 경우는 117㎞를 찍었다"며 "오전 9시쯤 나서 오후 4시 전후까지 배달을 한다"고 말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보람도 컸다. 모든 소식을 우편으로 받아보던 시절, '좋은 소식'을 배달하는 것은 집배원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박 씨는 "예전에는 대학교나 사법고시 합격 통지서 등도 모두 등기로 발송됐다"며 "좋은 소식을 전할 때는 받는 사람도 저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1남 1녀'의 자녀를 뒀다는 고 씨는 "(지금보다 일이 바쁘던 시절에는) 아이들이 매일 아빠의 등만 봐야 했다"며 "그럼에도 잘 커준 게 큰 보람이다. 나이가 먹으니까 남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편배달 차량이 세워져 있는 서귀포우체국.
반가운 소식 줄어도… 우편배달 타고 흐르는 '온기'

세월이 흐르며 근무 환경은 나아졌지만 한편에는 아쉬움도 있다. 우편물이 전보다 크게 늘어났는데도 '반가운 소식'은 더 찾아보기 어려워서다.

"예전에는 군에서 훈련병이 보낸 편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화를 할 수 있어서 그런지 그런 편지도 많지 않습니다. 손 글씨로 쓴 편지가 하루에 한두 통 보이나마나 할 정도로 적지요. 많이 삭막해 졌습니다. 예전엔 집배원이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 돈 내라는 것 밖에 없으니 다들 도망가기 바쁠 수밖에요." 고 씨의 말에선 안타까움도 묻어났다.

손 편지가 줄고 우편물 받는 게 반갑지만은 않은 요즘에도 집배원의 배달에는 온기가 흐른다. 우편물을 전하며 어르신들의 말벗을 하는 걸 좋아한다는 고 씨는 "그게 나한테도 힐링"이라고 했다.

"제 배달 구역인 제주시 삼도동엔 자식을 출가시키고 혼자 사는 1930년대생 분들이 많습니다. 다들, 돌아가신 제 어머니 같기도 해서 매일 안부를 묻게 되지요. 등기를 전하며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려 드리고 오늘은 무얼 하셨는지, 지금도 뭐 하고 싶은 게 있으신지도 물어봅니다. 어찌 보면 오지랖인데 어르신들은 엄청 좋아하세요. 저 역시 어머니가 살던 것과 비슷한 얘기를 들으면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이 나기도 하고요."

집배원은 때론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기도 한다. 박 씨는 "요즘 사회가 개인화되면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까진 정이 남아있다"며 말을 이었다.

"배달을 하며 주민들과 서로 인사하다 보면 서로 잘 알게 됩니다. 친형님, 친동생처럼 지내는 경우도 있고요. 무거운 봇짐을 짊어져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으면 집까지 짐을 날라주기도 하고, 우편물을 배달하러 갔는데 수돗물이 틀어져 있으면 잠가준 적도 허다합니다. 도로 위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으면 지나가는 순찰차를 불러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요. 주민과 친구처럼 잘 지내면 민원도 없습니다. (웃음)"

서귀포우체국 정문에 놓여 있는 빨간우체통. 세월이 흐르면서 손편지는 줄었지만 우체통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반가운 소식을 기다린다.
새해 듣고 싶은 소식? "오늘도 안전"·"코로나 종식"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은 곳을 오가며 배달을 하다 보니 "'새해'라는 개념이 없어진다"는 고 씨이지만 새해 소원을 빌듯 간절한 소망을 품는다. 고 씨는 "이륜차를 타는 일이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보니 안전이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며 "새해라서 뭘 잘해야겠다거나 새 목표를 정하기보다 지금처럼 저나 모든 팀원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재밌게 살면서 한 달, 또 다른 1년을 맞았으면 한다"고 했다.

항상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입장이지만 올해는 꼭 전해 듣고 싶은 소식도 있다. 박 씨는 '코로나19 종식'을 꼽았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모든 직원들이 아프지 않고 순탄하게 이겨낸 게 큰 다행"이라면서도 "코로나19로 인해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 같이 모이는 조회도 안 하다 보니 얼굴도 잘 모르는 경우가 생긴다. 예전처럼 직원들이 마스크 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교류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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