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희의 하루를시작하며] 삼만의 자리에서
입력 : 2026. 03. 25(수) 01:00
한상희 hl@ihalla.com
[한라일보] 3월의 제주, 돌담 아래와 밭두렁 사이에서 수선화가 고개를 든다. 겨울 내내 땅속에서 시간을 견디다 기온이 조금만 오르면 조심스레 얼굴을 내미는 꽃이다. 충분히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을 때, 스스로의 시간이라 판단하면 피어난다. 나는 이 작은 꽃의 결단 속에서 나의 결단을 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꿈을 꿨다. 바닷물에 손을 담갔는데 뼈들이 손끝에 닿았다. 그 뼈들을 하나씩 건져 공동묘지 무덤 옆 비석 위에 올려놓고 깨어났다.

아침에 어머니께 꿈 이야기를 했더니 말씀하셨다.

"네가 외할아버지 꿈을 꿨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어머니가 4·3 당시 여덟 살 아이였다는 사실을.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던 두려움, 아버지 없는 삶의 그리움, 친척 하나 없이 자라야 했던 고독. 그 감정의 무게는 어쩌면 한 사람이 평생 쌓아 올린 시간과 맞먹을지도 모른다.

꿈을 꾼 날, 나는 결심했다. 그 아이에게 한 오라기의 슬픔이나 한 톨의 외로움도 더하지 않겠다고. 그 약속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머니는 그 모든 시간을 여덟 살의 몸으로 건너왔다. 소녀는 자라 해녀가 됐고, 시장의 상인이 됐으며, 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러니까 나는 여덟 살 소녀가 다시 삶의 회복을 향해 걸어온 시간의 연장선 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날 이후 4·3은 교과서 속 사건이 아니라 나의 현재가 됐다. 삼만 명이라는 숫자는 삼만개의 얼굴이 됐고, 삼만개의 하루가 됐다.

죽음은 생명만 빼앗지 않았다. 다정한 밥상, 더 자란 아이들의 키, 이어졌을 노동과 사랑, 갈등과 화해, 젊음과 나이듦. 오늘 우리가 살아내는 평범한 하루는 끝내 살아보지 못한 그들의 하루 위에 놓여 있다.

작년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한때 말해지지 못했던 이름과 사건, 사라졌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세계가 함께 직면해야 할 기억이 됐다. 그것은 진실 규명과 회복의 여정에 동참하겠다는 약속이며, 침묵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증언이다.

수선화처럼 작은 자리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디다 끝내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이다.

그러나 기록이 남는다고 해서 기억이 저절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은 질문을 남기고, 그 질문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어떤 선택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기록은 과거의 문서로 남을 수도 있고, 오늘의 삶이 될 수도 있다.

아침 산책길, 다시 수선화 앞에 선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고개를 드는 작은 꽃 하나.

오늘 아침, 나는 다시 삼만의 자리에 선다. 꽃이 지고 말이 끊겼던 자리에서 다시 꽃이 핀다.

나는 삼만의 하루 위에 서서, 어떤 선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한상희 서귀포중학교장·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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