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50] 3부 오름-(109)베릿내오름과 활오름
입력 : 2025. 11. 11(화) 03:00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벌거벗어 추해도 임금님은 화려하다 해야 살아남아
깎아지른 벼랑, 베릿내오름


[한라일보] 서귀포시 중문동 바닷가에 표고 101.2m, 자체 높이 61m의 베릿내오름이 있다. 이 오름은 세 봉우리로 구분된다. 남쪽 바다 방향에서 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전망대는 동오름이라 한다. 여기서 서쪽으로 대칭이 되는 부분이 섯오름이다. 북서쪽 봉우리는 '만지섬오름'이라고 한다.

네이버지도는 만지섬오름 위치의 해발 100.2m를 이 오름의 정상으로 표기했고, 카카오맵은 동오름을 그 높이와 함께 정상이라 했다. 제주도가 발행한 '제주의 오름'은 정상을 101.2m로 표기했다. 어느 봉우리가 정상인지, 높이는 얼마인지 모를 지경이다.

베릿내. 폭포가 발달하고 경사가 급한 내다. 선임교에서 촬영.
이렇게 세 개의 봉우리가 서로 높낮이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건 위가 평평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지섬오름'이라는 지명은 제주도가 발간한 제주의 오름이라는 책에 나온다. 이것은 인근에 '만지세미'가 있는 정황으로 볼 때 '만지샘오름'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이 '만지'의 '만'은 '마르'의 변음 '만', '지'란 '마르 지(旨)'에서 온 말로 '위가 평평한 오름'의 뜻일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바로 서쪽 면이 베릿내와 접해 있다는 점이다. 베릿내는 서귀포시 중문 천제연폭포가 있는 내다. 천제연폭포는 3단 폭포인만큼 베릿내는 급경사다. 그뿐만 아니라 연중 떨어지는 폭포수와 이따금 쏟아지는 폭우가 합쳐지면서 수천년 아니 어쩌면 수만년을 흘러 이 오름을 깎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벼랑이다. 이 내를 베릿내라 하고 이 오름을 베릿내오름이라 한 것을 보면 고대인들에게는 이 벼랑이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부여어와 고구려어와도 같은 기원


이 오름은 1770년경 제작된 '제주삼읍도총지도' 등에 '성천봉'(星川峰), 1965년 '제주도'에 베린내오름과 '성천악'(星川岳)으로 표기됐다. 지역에서 이외에 몇 가지가 추가로 채록된 바 있으나 대체로 베릿내오름 유사음들이다.

베릿내오름의 측방 침식면. 깎이고 깎여 절벽을 이룬다.
고전에 나오는 성천봉(星川峰) 혹은 성천악(星川岳)의 '성(星)'이란 '별 성' 자다. '별'은 제주어에서 '벨'로 발음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星)'이란 훈가자 즉, 훈의 발음을 표기하는 방식으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릿내오름'이라는 발음을 기록자는 '베리가 있는 오름'으로 받아들였거나, '베리가 있는 내가 있는 오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베리'라는 발음은 '벼라' 즉, 벼랑의 의미인데, 기록자는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베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썼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니 '베리' 혹은 이걸 축약한 '벨'을 그저 소리 나는 대로 읽으라는 취지로 '별 성(星)' 자를 빌려 쓴 것이다. 하늘의 별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천(星川)'은 그냥 '베리내'라 읽으라는 취지다.

벼랑의 중세어가 '벼라'다. 이 오름 혹은 이 내의 지명에 들어있는 '벨' 혹은 '베리'가 국어의 중세어 '벼라'와 같은 기원인지 별개의 갈래에서 분화한 언어인지 단정하기에는 다소 검토의 여지가 있다. 본 기획에서 다뤄왔던 제주 지명에서 국어와는 다르게 기원한 예를 봐왔기 때문이다. 퉁구스 고어에서 '경사가 심한'이라는 뜻으로 쓰는 '비리'라는 말이 있다. 북방의 어떤 언어에서는 '바위', '절벽'으로도 분화했다. 퉁구스어란 부여어와 고구려어와 관련이 깊은 언어다. 어쩌면 국어와 제주어가 같은 기원을 가지는 일단을 보여주는 예일 수도 있다.



다 함께 합창 “활 닮았다!”


인근 도순천 변에 '활오름'이라는 특이한 지명의 오름이 있다. '궁산'이라고도 한다. 이 오름은 서귀포시가 발간한 서귀포지명유래집에 활모양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돼 있다. 그래선지 여기저기서 활을 닮았다고 한다. 이 오름이 정말 활을 닮았을까?

베릿내오름. 정상 부분이 평평한 마루를 이룬다. 중문관광단지에서 촬영. 사진=김찬수
이 오름도 위의 베릿내오름처럼 계곡에 붙어 있다. 세 개의 도순천 지류 중 동쪽 지류 동편에 있다. 이 계곡에 닿아 있는 서사면이 침식돼 급경사를 이룬다. 그러니 '베리오름' 혹은 '베린오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벼랑이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이 오름을 '베리오름'이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록자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난감했을 것이다. 베릿내오름에서는 '벨 성(星)' 자를 빌려 썼다. 그런데 이 오름을 기록한 사람은 '베리'를 어떻게 쓸지 고민하다 '활 궁(弓)' 자를 동원했다. 왜 그랬을까? 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베리'란 만주어로 활을 지시하는 말이다. '궁(弓)'은 국어에선 '활 궁'이라 하나 만주어에선 '베리 궁(弓)'이다.

이렇게까지 했을까? 조선 시대에는 만주어 교재 팔세아(八歲兒), 청어 역관 학습서 소아론(小兒論), 만주어 회화교재 청어노걸대(淸語老乞大) 같은 만주어 책들이 있었다. 청(靑)을 상대하던 시기 만주어란 오늘날 영어 같은 존재다. 이리하여 '활오름'으로까지 분화했다. 한자로 궁산(弓山)이라고 쓸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또 한 가지 추론은 '베리오름'으로 부르는 선주민 사회에 '베리'를 활이라고 하는 만주어 언어사회가 섞이면서 지명의 뜻이 바뀐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이라는 사기꾼에 속은 임금님 이야기다. 보이지 않아도 자신이 찍힐 게 두려운 신하들은 "우와~ 화려하다"라며 아첨한다. 오직 어린이들만이 "임금님은 벌거벗었잖아"하고 외친다.

활오름, 처음에는 벼랑이 있는 '베리오름'이었다. '베리'라는 말이 만주어로는 '활'이라는데 착안해 '궁산'이라 하면서 오늘날에 와서는 아예 '활오름'으로 불리게 됐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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