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문화광장] 가을의 초록 들판
입력 : 2025. 11. 04(화) 01:00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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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가을을 실감하기도 전에 겨울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한층 다가온 느낌이다. 10월이 다 지나도록 가을 정취를 느끼기 어려웠는데, 11월이 되자 갑자기 겨울 냄새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둔탁해진 시간 감각이 깨어나는 것은, 유난히 바쁘게 흘러간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10월은 역사적 굴곡이 특히 깊은 시기다. 10월 항쟁으로 시작해 부마항쟁과 여순항쟁, 그리고 10·26 사건까지, 쟁쟁한 항쟁의 시간들을 기리는 일들로 전국의 예술인들과 함께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11월에 접어들어 망중한의 호기로 호남 벌판을 내달리는 마음은 느긋함 그 자체였다.
호남의 너른 땅을 가득 채운 황금들녘을 바라보며 무르익는 가을의 정취를 실감하고 있을 때, 나의 눈에 낯선 풍경 하나가 들어왔다. 누런 들판 곳곳에 듬성듬성 보이는 초록 논이었다. 가을 논의 초록이라니! 모순이다. 그 실체는 벼베기를 끝낸 논의 볏그루에서 자라나는 새싹들이었다. 가을 새싹이라니. 생명이 사그라드는 계절에 새싹이 피어나다니. 새삼스러운 질문을 이어가다 문득 깨달았다. 싹둑 잘려나간 볏대 밑의 뿌리는 여전히 생명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모내기를 끝낸 벼처럼 초록초록한 가을 논을 바라보며 생명의 신비를 실감했다. 가을에 접어들어도 여름이 가시지 않았던 기후위기의 영향일까 생각해 보다가, 겨울 눈밭에 싹을 틔우는 보리밭을 떠올리니, '아하, 새싹은 한겨울에도 피어난다.'
죽음 앞에서도 삶을 멈추지 않는 생명의 귀한 뜻을 보며, 나는 낮은 탄식을 쏟아냈다. 가을을 실감하는 일은 놓쳤지만, 겨울 냄새나는 가을 들판에서 봄을 보는 이 역설 앞에서 생명의 힘을 체감했다. 누런 벼와 초록 볏그루가 공존하는 이 애매한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생명이 사그라드는 계절에 새싹을 틔우며 순리를 거스르는 이 반역의 시간을 바라보며, 불현듯 동학군들이 떠올랐다. 우금치 전투가 11월 8일경 시작됐다고 하니, 동학군들은 아마도 이 즈음에 호남 들판을 가로질러 충청도로 올라갔을 것이다. 동학군들도 서둘러 가을걷이를 끝내고 길을 나섰을 것이다.
봄날의 1차 봉기가 몸의 목숨을 지키려는 절규였다면, 늦가을의 2차 봉기는 마음의 목숨을 지키려는 함성이었다. 2차 봉기에 나선 동학군들은 우금치를 넘지 못했다. 130년 만에, 키세스 전사들과 함께 트랙터를 타고 남태령을 넘은 전봉준 투쟁단의 쾌거는, 게틀링 기관총 앞에 속절없이 스러진 무수한 목숨들 앞에 바치는 헌사였다. 한 계절 제 몫을 살아내어 주렁주렁 벼 알갱이를 남기고는 이내 베어져 볏그루만 남긴 벼들. 아직 생명의 기억을 지우지 않고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저 들판의 벼들은, 역사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동학군들이 가을걷이를 하고 떠난 1894년 가을 호남 들판의 볏그루들도 마지막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싹을 틔우고 있었을까. <김준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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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도 삶을 멈추지 않는 생명의 귀한 뜻을 보며, 나는 낮은 탄식을 쏟아냈다. 가을을 실감하는 일은 놓쳤지만, 겨울 냄새나는 가을 들판에서 봄을 보는 이 역설 앞에서 생명의 힘을 체감했다. 누런 벼와 초록 볏그루가 공존하는 이 애매한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생명이 사그라드는 계절에 새싹을 틔우며 순리를 거스르는 이 반역의 시간을 바라보며, 불현듯 동학군들이 떠올랐다. 우금치 전투가 11월 8일경 시작됐다고 하니, 동학군들은 아마도 이 즈음에 호남 들판을 가로질러 충청도로 올라갔을 것이다. 동학군들도 서둘러 가을걷이를 끝내고 길을 나섰을 것이다.
봄날의 1차 봉기가 몸의 목숨을 지키려는 절규였다면, 늦가을의 2차 봉기는 마음의 목숨을 지키려는 함성이었다. 2차 봉기에 나선 동학군들은 우금치를 넘지 못했다. 130년 만에, 키세스 전사들과 함께 트랙터를 타고 남태령을 넘은 전봉준 투쟁단의 쾌거는, 게틀링 기관총 앞에 속절없이 스러진 무수한 목숨들 앞에 바치는 헌사였다. 한 계절 제 몫을 살아내어 주렁주렁 벼 알갱이를 남기고는 이내 베어져 볏그루만 남긴 벼들. 아직 생명의 기억을 지우지 않고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저 들판의 벼들은, 역사의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동학군들이 가을걷이를 하고 떠난 1894년 가을 호남 들판의 볏그루들도 마지막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싹을 틔우고 있었을까. <김준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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