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64] 3부 오름-(123)제지기오름 뾰족하게 돌출한 벼랑 오름
입력 : 2026. 03. 03(화) 02:00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글자에 매달려 풀어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한 지명
한자표기 이전 고유지명엔 접근조차 못 해

[한라일보] 서귀포시 보목동에 제재기오름이라는 야트막한 오름이 있다. 높이가 불과 92.1m 정도로 낮으나 사방이 급경사를 이루고, 일부분은 바위가 노출된 낭떠러지다. 요즘 지도에는 '제지기오름'으로 표기돼있고, 지역에서는 제재기오름, 저즈기오름, 제즈기오름, 제제기오름으로 부른다. 1709년 문헌인 탐라지도를 비롯한 고전에 저즉악(貯卽岳), 저좌지(貯左只), 저적악(儲積岳), '사악(寺岳)'으로 표기했다. 보목동 마을의 홈페이지에는 '절오름'으로 표기돼 있다.

이 지명에 대해 과거 이 오름에 절지기가 살았었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라거나 오름 모양이 낟가리 비슷한 데서 붙은 이름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글자에 매달려 풀어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른 시기의 한자표기를 고려할 때 '저즈기오롬' 또는 '저저기오롬' 정도로 부르던 것이 나중에 '제지기오롬'으로 소리가 변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추정한 학자도 있다. 그러면서도 그 뜻은 모른다고 한다.

제지기오름, 주변 지형에 비해 단연 뾰족하게 돌출된 오름이다. 섶섬에서 촬영.
가장 오래된 표기 '저즉악(貯卽岳)'은 1709년(조선 숙종 35년)에 편찬된 탐라지도에 처음 나온다. 과연 당시 이 지역 일반인들이 '저즉악'이라고 불렀을까? 절이 있었다면 왜 처음부터 '사악(寺岳)'이라고 하지 이런저런 이름을 적어 놨단 말인가? 낟가리 모양이라서 '저즉악(貯卽岳)'이라고 했다면 '노적봉(露積峯)'이나 '노적악(露積岳)'이라 할 것이지 왜 이렇게 어렵게 썼단 말인가.



300년 전 부르던 이름 '뎌리고지'

'저(貯)'라는 글자는 '쌓다, 쌓아 놓다'라는 뜻을 갖는다. '저즉'이라는 말은 '즉을 쌓았다'라고 풀어야 하므로 '즉'이 무엇인지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쌓을 수 있는 '즉'이 무엇이란 말인가? '즉(卽)'이란 글자는 네이버 한자사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①곧 ②이제 ③만약(萬若) ④만일(萬一) ⑤혹은(或-: 그렇지 아니하면) ⑥가깝다 ⑦가까이하다 ⑧나아가다 ⑨끝나다 ⑩죽다 ⑪불똥 등이다. 이 들 중 쌓을 수 있는 물건은 없다. 마지막 열 번째 뜻인 불똥이 그나마 쌓을 수 있을지 모르나 낟가리 모양으로 쌓는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보목 앞바다에서 바라본 제지기오름, 한라산이 막힘없이 잘 보인다. 김찬수
'저(貯)'라는 글자가 들어간 오름 지명으로 '뎌리벼리오름'이 있다. 본 기획에서 다룬 적이 있다. 이 오름은 저리별이(貯里別伊), 저별리(貯別里), 저성(貯星), 저별악(貯別岳), 저별봉(貯別峰)으로 나온다. 역시 '별(別)'이나 '별(星)'을 쌓는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절울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절'과는 관련이 없었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높고 험한 벼랑으로 된 오름'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저즉악(貯卽岳)'과 '절오름'은 바로 '저별악(貯別岳)'과 '절울이'에 각각 대응하지 않을까?

먼저 '저별악(貯別岳)'과 '저즉악(貯卽岳)'의 대응 관계를 보자. 두 오름 이름에 나오는 '저(貯)'는 완벽히 일치하고 있다. '저별악(貯別岳)'의 '저(貯)'는 '뎌리'를 표기한 것이고 '별(別)'은 '벼리'를 표기한 것이다. 그래서 '저별악(貯別岳)'은 '뎌리벼리오름'이다. 그렇다면 '저즉악(貯卽岳)'의 '저(貯)' 역시 '뎌리'를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뎌리'는 '졀'로, '졀'은 '절'로 변음하는 것이다.

그럼 '즉(卽)'은 무엇일까? 이것은 '저별악(貯別岳)'의 '별(別)'과 아무런 관련성을 찾을 수 없다. 그러면 우선 '저즉악(貯卽岳)'은 '뎌리즉오름'이라고 해 보자. '뎌리'가 '높고 험한'이라는 뜻이므로 '높고 험한 즉 오름'이 된다. 이런 말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즉(卽)'은 바로 위에서 제시한 한자 사전의 뜻 중 첫 번째 뜻인 '곧'을 표현하고자 빌려온 글자인 것이다. 국어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훈가자라고 한다. '곧'이란 따로 떼어내 쓴다면 구개음화 현상으로 '곶' 또는 '고지'로 읽힌다. 지명 중 '지(只)'라는 글자는 어조사로서 아무런 뜻이 없다. 그렇다면 '뎌리즉오름'은 '뎌리곧이오름'이 되고 다시 '뎌리고지오름'으로 변음했을 것이다. '저즉악(貯卽岳)'이란 표기 외에 '저좌지(貯左只)'라고 하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흔히 '뎌리고지'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좌지(貯左只)'란 '절즉이'를 표기한 것이다.



뾰족하게 돌출한 벼랑 오름

이처럼 300년 전 제주도 사람들, 특히 볼레낭개 주민들은 이 오름을 '뎌리고지'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느 한때 '뎌리'가 '절'로 줄어들면서 '절오름' 또는 '절고지'라고 했던 시기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음운의 변화에 따른 것이지 뜻 자체가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서귀포시 서호동 각시바위오름은 지금도 절꼭지 혹은 절곡지라 불린다. 제지기오름의 과거 명칭 '절고지'와 일치한다. 제지기오름의 고유지명을 보는 듯하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고지'라고 하는 지명의 뒷부분에 나오는 요소는 '곶(岬)'의 한 변이형태다. 즉, '곶+이'에서 파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지형이 불쑥 튀어 돌출된 부분'을 말한다. 불쑥 튀어 돌출된 부분이란 주로 해안선에 육지가 바다로 돌출된 것을 말하지만 평야에 '凸'형처럼 튀어나온 지형도 포함한다. '절고지'는 보목동, 송산동을 비롯한 서귀포 시내와 신효동, 하효동 일대가 평평한 평야를 이루고 있는데 유독 이 오름이 뾰족하게 돌출돼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제지기오름, 제재기오름, 저즈기오름, 제즈기오름, 제제기오름으로도 부르는 이 오름의 원래 이름은 절이 있어서 절오름도 아니고, 낟가리 모양이라서 이름에 '저(貯)'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도 아닌 '뾰족하게 돌출한 벼랑 오름'이란 뜻의 '뎌리고지' 혹은 '절고지'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226 왼쪽숫자 입력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한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