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단풍소나무'
입력 : 2013. 09. 25(수) 00:00
가을을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 했다. 온 들녘 초목이 가을을 넘기며 울긋불긋 단풍으로 붉게 변한 산야를 그렇게 불러왔다. 현재 제주의 들녘을 보면 마치 만산홍엽이 연상될 정도로 충격적이다.

올 여름 이후 도 전역에서 급속도로 수십년동안 자생해 온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단풍나무를 연상할 정도로 붉게 변해 죽어 가면서 때아닌 '단풍소나무'로 명명되고 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모이면 나오는 화두가 소나무 고사목일 만큼 관심사다.

국민의 나무이자 오롯이 농업으로 살아온 도민들에게 아주 친숙한 소나무의 재선충 감염으로 인한 고사현상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최근 소나무 고사가 재선충병 감염과 장기가뭄, 온난화 등의 원인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지만 대부분 재선충병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소나무 에이즈로 불리는 소나무재선충병은 재선충에 감염된 솔수염하늘소가 소나무의 새가지(신초)를 가해하는 과정에서 전염된다. 소나무로 옮긴 재선충은 급속하게 증식해 소나무의 수분 이동 통로인 가도관을 막아 나무를 고사케 한다. 제주지역의 경우 지난 2004년 제주시 오라동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매년 피해면적이 확산되어 왔다.

특히 올해 소나무 재선충병은 구좌, 애월읍은 물론 대정, 안덕지역에 이르기까지 도 전역에 지난 7~8월 집중적으로 퍼졌다. 제주시내 별도봉 사라봉에서부터 최남단 대정읍에 이르기까지 마을 인근 오름, 경작지나 도로 주변 소나무밭, 도로 조경수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붉게 물든 소나무 고사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사태가 심각하다.

소나무 재선충병의 창궐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행정당국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가 8월 본보의 집중 보도에 이어 9월들어서야 소나무 재선충과의 '전쟁'에 나섰고, 우근민 지사도 이후 담당국장직을 걸고 소나무 보전대책을 지시한데 이어 24일엔 전도민 대상 호소문을 발표했지만 실기(失機)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지금 도민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우리 소나무 숲에 위기가 닥쳐 왔다. 120만 도민의 역량을 모아 제주의 소나무 숲과 청정 산림자원을 지켜내자"는 발표 내용에서 사안의 심각성을 짐작케 한다.

이번 사태는 도 산림행정의 관리체계 부실과 늑장대응 등의 문제를 낳았다. 당초 고사목의 10~20%만을 재선충 감염목이라 했다가 한 연구소측에서 해발 200m 이하(봄 조사시)에서 평균 25%를 재선충 감염목이라 지적하자 도지사 발표에선 슬쩍 이를 인용(?)했다. 한창 피해면적이 늘던 7~8월엔 꿈쩍도 안하다가 9월 들어서야 '전쟁'을 벌인다고 야단법석이다.

이 칼럼이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에 나무옷을 갈아입는 단풍에 대한 예찬이 아닌 소나무 고사목을 '단풍'으로 묘사해야 하는 역설도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세계자연유산 제주를 외치면서 도민과 가장 가까운 자연경관 소나무들이 저토록 무차별 고사된데 대한 행정당국의 책임소재가 그냥 묻혀져선 안된다. 사후라도 분명하게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도정은 제대로 했는지, 관련 공무원들의 직무태만은 없는지 등등을 따져봐야 한다.

하루 수 번씩 생업현장을 오가면서 붉게 변한 소나무를 보는 도민들의 마음은 매일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가슴이 무너집니다." <김기현 경제부장>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1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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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비 09-25 09:13삭제
얼빠진 집단의 결과론적 관점에서 당연한 귀결로 ..좋은글쓰셨군요
붉게 물든 단풍소나무들이 손뼉을 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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