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보리밭에서 되찾은 이름, 영옥
입력 : 2026. 05. 12(화) 02:00
김정선 hl@ihalla.com
[한라일보] 영화 '내 이름은'은 제주 4·3 비극 속에서 이름을 지우고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이 긴 세월 끝에 진짜 나를 찾아가는 숭고한 여정을 그린다. 주인공은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은 친구의 이름을 빌려 평생을 최정순으로 살아왔다.

한 개인의 삶에 새겨진 상처는 베트남 전쟁과 5·18 민주화운동의 소용돌이를 지나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특히 손자에게 자신의 본명인 영옥을 무의식중에 선물하는 장면은, 단절된 정체성을 회복하고 비극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려는 인간 본능의 위대한 시도로 읽힌다. 다행히 손자 영옥은 지독히 과거의 현장에서도 비굴하게 굴지 않고 자신을 건강하게 지켜내며 비극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희망이 된다.

기억의 자물쇠를 여는 마지막 열쇠는 결국 직면이었다. 제주의 바람이 스치는 보리밭에서 그녀는 마침내 잊혔던 자신의 이름 영옥과 마주 선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아, 보리밭이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직이 움츠린 그 탄식처럼,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어딘가에서 조용히 되살아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년기 자아통합을 연구하는 상담가로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이 아픔의 세대적 흐름을 성찰하고 전환해 나갈 것인가. 우리는 이미 치유의 길을 걷고 있다. 보리밭에서 이름을 되찾은 그녀처럼 이제 우리도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 이 영화가 마음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따뜻한 손길이 되길 소망한다. <김정선 교육학 박사·노인상담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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