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172] 3부 오름-(131)갑선이오름
입력 : 2026. 05. 12(화) 03:00
김찬수 hl@ihalla.com
‘골짜기가 있는 오름’을 ‘껍질을 못 벗는 매미’라 하다니
지렁이형 계곡이 특징인 오름

[한라일보] 갑선이오름의 지명은 미스터리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마을 동쪽에 있다. 제주도 오름의 평균 높이가 81m, 저경이 591m인 점에 비추어 제주도 오름의 표준 정도로 볼 수 있다. 높이는 평균에 비해 2m가 높고, 저경은 불과 13m가 짧을 뿐이다. 오름 능선을 기준으로 양쪽 사면이 급경사로 돼 있다. 서쪽은 분화구 방향이면서 가시리 마을 방향이다. 정상에 도착하면 동쪽으로 시야가 확 트이는데, 발아래 경사면은 마치 절벽처럼 느껴진다.

갑선이오름(정면 오른쪽)과 설오름(왼쪽) 사이에 형성된 가시리 전경. 토산봉에서 촬영.
이러한 경사면에서 흘러드는 물이 모이는 깊고 긴 골짜기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지형이다. 이 골짜기는 표선면 가시리 794-1번지에서 시작해 가시리 3801번지에 이르는데 오름을 중심으로 반원형을 그리며 흐른다. 길이는 약 950m 정도로 짧지만 대규모 저류지를 두 곳이나 만들었다. 이 골짜기는 갑선이오름 남쪽에서 발원해 가시천으로 흘러드는 지류와 연결된 듯 보이지만 사실 완전히 단절돼 있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이 내륙에 한정돼 있어 바다에 이르지 못하는 지렁이형 하천이라 할 수 있다.

갑선이오름이라는 지명을 "오름의 모양이 '껍질을 못 벗는 매미 같다'라는 뜻에서 유래한다"라고 설명한다. 황당한 이야기다. 한자 표기 甲蟬岳(갑선악)을 풀이한 설명이다. 1703년 탐라순력도 등 여러 고전에 갑선악(甲先岳), 갑선악(甲旋岳)이라고 한 표기를 볼 수 있고, 지역에서는 갑선악(甲仙岳), 갑선악(甲先岳), 갑선악(甲禪岳), 갑선이악(甲先伊岳) 등으로 표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갑선이오름 자락에 있는 골짜기. 재해위험지구 정비사업 공사 중이다. 김찬수


'갑'의 옛 발음은 '골'

이 이름들의 특징은 우선 발음상으로 '갑선'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맨 앞글자 '갑'은 '甲(갑)' 하나만 나온다. '선'을 표기하는 데는 旋, 仙, 先, 禪, 蟬 등을 동원한 것으로 봐서 이 말에 특정한 뜻이 있어서라기보다 발음을 표현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갑선이악(甲先伊岳)이라는 표기에서 '이(伊)'자는 특별한 뜻이 없는 어조사이므로 '오름'이라거나 '악'이라는 후부 요소를 대신하는 뜻으로 그냥 '갑선이'라고도 불렀음을 짐작하게 하는 표기다. '악'은 덧붙은 말이다. 그렇다면 '갑(甲)'이라는 표기도 특별한 뜻을 표기한 것이 아니라 어떤 발음을 나타내려고 사용 빈도가 높은 글자를 동원한 결과라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갑'이라는 발음 속에는 과연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 지역에서는 갑선이오름을 '갑산봉'이라고도 한다. 왜 이렇게 부를까? 이 이름은 갑선이오름이라는 이름의 '선'에서 발음상 유추되는 '산'을 붙이고 오름을 '봉'이라는 한자음으로 변형해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선'이라는 말이 어떤 오래된 말과 연관하면서 자연스레 '산'이라는 뜻으로 대치된 것일까?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 편에 "갑성군 본 백제 고시이현 경덕왕 개명 금 장성군(岬城郡本百濟古尸伊縣景德王改名今長城郡)"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갑성군(岬城郡)은 본래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쳐 지금의 장성군이 됐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갑성군(岬城郡)의 '갑(岬)'은 산허리, 산골짜기라는 뜻을 갖는다. 그런데 이 '갑(岬)'이라는 글자는 오늘날 '갑'이라고 발음하지만, 당시에도 똑같이 발음했던 건 아니다. 1982년 중문대학출판사에서 나온 '한자고금음휘(漢字古今音彙)'라는 책을 보면 이 한자는 삼국사기가 지어질 무렵인 12세기 중반에는 '고(kou)'로 발음했다. 이 음은 '가'와 '고'의 중간 발음으로서 제주어에서 'ᄀᆞ'로 발음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 외에도 음이 비슷한 글자인 '갑 혹은 압(甲, 押, 土+甲) 등이 나오는데 모두 음독 표기로 '골'을 나타내려고 썼다.

가시리 마을 지명은 갑선이오름에서 기원

갑선이오름도 처음에는 '골'을 표기하고자 '갑'이라는 글자를 썼을 것이다. 그러면 이 오름의 지명은 당연히 '갑+ᄉᆞ이' 구조가 된다. 여기서 'ᄉᆞ이'란 봉우리를 나타내는 '수리'의 축약형이다. 이런 형태의 발음이 걸시오름의 '시', 가세오름과 걸세오름의 '세', 달랑쉬의 '쉬' 등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시(時), 수(秀), 수(岫), 수(峀), '修理(수리)', '술(述) 혹은 술이(述爾)', '수래(水來)', '거(車, 수래 거)', '주(酒, 술 주)', '수(首) 혹은 수을(首乙)' 등으로 나타난다. '서(西)', '서(瑞)', '시(時)', '시(豕)'로 표기한 지명도 있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갑선악(甲仙岳), 갑선악(甲先岳), 갑선악(甲禪岳), 갑선이악(甲先伊岳) 중 '선(仙, 先, 禪, 先伊)' 등 여러 형태의 '선'들은 '시' 혹은 '세'의 발음을 표기한 것이다. '수리'의 준말이다. 이게 갑선이로 됐다는 것인데, 이처럼 '갑ᄉᆞ이'가 '갑선이'로 발음되는 현상은 동화현상의 하나인 비음화와 유음화가 결합된 음운변화 현상이다. 'ᄉᆞ' 뒤에 오는 '이'가 앞의 받침 'ㅂ'과 만나면서 발음이 매끄럽게 이어지기 위해 변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방언이나 옛 국어에서 나타나는 자음동화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갑선이오름 지명은 '골수리'라 부르던 것이 'ᄀᆞᆯ쉬'로 축약되고, 한자표기의 영향으로 '갑ᄉᆞ이', '갑선이'로 변천한 지명이며, 골짜기가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가시리'라는 마을 이름 '가시'는 'ᄀᆞᆯ시'에서 'ㄹ'이 탈락한 형태인 고대어 'ᄀᆞ시'가 한자 표기 과정에서 '가시'로 변한 지명이다. 의미상 토산리 가세오름과 같은 지명이다. 본 기획에서 가시리는 가세오름에서 기원한 지명이라 한 바 있지만 마을에서 더 가까운 갑선이오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한 추정일 것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355 왼쪽숫자 입력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한라일보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