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돌하르방·육지 석장승 비교해보니… "조성 시기와 맞물려"
입력 : 2025. 11. 05(수) 18:37수정 : 2025. 11. 05(수) 18:48
박소정 기자 cosoro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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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연구센터 보고서
석장승 147기 현지조사
"형태 손상 보전 마련을"
석장승 147기 현지조사
"형태 손상 보전 마련을"

제주읍성의 돌하르방 얼굴 이미지와 유사한 전북 부안 동문안 하원당장군(사진 왼쪽)과 전남 곡성 가곡리 마을벅수(사진 오른쪽) 모습. 제주학연구센터 제공
[한라일보] 제주의 상징인 '돌하르방'과 육지부에 있는 '석장승(벅수)'을 비교 연구하는 민속학적 조사가 이뤄졌다.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는 2025년 제주학 연구 공모 지원 사업 과제 '제주 돌하르방과 석장승(벅수)의 비교민속학적 연구' 보고서를 최근 내놓았다.
이번 연구는 제주 돌하르방과 육지부에 있는 석장승을 비교민속학적 측면에서 고찰해 한국의 석장승의 조성 시기, 형태적 특성, 기능을 분석해 돌하르방의 위상을 살펴봤다. 이를 위해 연구진은 지난해 12월부터 육지부에 있는 총 220여 기 석장승 가운데 제주도를 비롯한 육지부 석장승이 있는 58곳의 147기를 현지 조사·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 돌하르방은 육지부의 '성문벅수', '마을벅수'의 성격을 띤다. 제주읍의 동·서·남문, 정의현성 동·서·남문, 대정현성 동·서·남문에 세워져 수문장이면서 성안에 들어오는 외적이나 잡귀를 막고 성안 사람들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기능이 우세하다. 영·호남 지역민은 석장승을 대부분 '벅수'라고 칭하는데, 그 기원인 법수(法守·法首)가 벅수로 음운이 변천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벅수의 가장 중심적인 기능은 조선시대 창궐했던 천연두, 역질, 역병, 염병이라고 하는 두창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시기상으로 영·호남 지역 벅수가 17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제작 조성되고 있는 점에 비춰볼 때 제주 돌하르방의 조성 시기도 거의 이에 맞물린다.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전북 부안읍성 동문 안 벅수는 현종 12년(1671년)으로 돼 있고, 부안읍성의 서문 안 당산의 벅수는 숙종 15년(1689년)에 제작됐다. 동문의 하원당장군은 제주읍성의 돌하르방 얼굴 이미지와도 유사했다.
형상적 측면에선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인면형에 속하면서도 무사(武士)인 장군 형상을 지닌다. 연구진은 "육지부 귀면형 벅수는 거의 손이 없고 특히 얼굴 모습을 강조하는데 혀, 수염, 날카로운 이빨이 사악한 괴질이나 역병을 가져오는 잡귀신에 대한 저항 무기"라며 "이에 반해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벙거지형 모자, 큰 눈방울, 주먹코, 뭉툭한 볼, 얼굴 형상 등 인면형이지만 위 아래로 누르는 큰 손이 있어 잡귀들을 누를 수 있는 압권의 형상"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어 "대정현성·정의현성의 돌하르방은 인면형이면서도 육지의 마을 미륵 벅수와 닮아있고, 제주읍성 돌하르방과는 형상 면에서 확연히 구분된다"며 "돌하르방은 육지의 성문벅수나 마을벅수처럼 민간신앙 면이나 무속적 관념은 거의 남지 않다"고 전했다.
연구책임자인 좌혜경 박사는 "제주 돌하르방이 지방민속유산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고 근간에 많은 돌하르방이 세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육지부 벅수와 공동 보전 방안 모색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17세기에서 18세기 조선조 숙종과 영조 당시에 만연했던 전염병인 '천연두'라는 역병을 물리치기 위해 인면, 괴면, 미륵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석상들은 자연 속에서 민신(民神)이 되어 있으나, 300년이나 지난 시간 속에서 석상은 마모되고 그 형태도 손상되어 시급한 보전 정책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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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 따르면 제주 돌하르방은 육지부의 '성문벅수', '마을벅수'의 성격을 띤다. 제주읍의 동·서·남문, 정의현성 동·서·남문, 대정현성 동·서·남문에 세워져 수문장이면서 성안에 들어오는 외적이나 잡귀를 막고 성안 사람들을 보호하는 수호신의 기능이 우세하다. 영·호남 지역민은 석장승을 대부분 '벅수'라고 칭하는데, 그 기원인 법수(法守·法首)가 벅수로 음운이 변천된 것으로 보고 있다.
벅수의 가장 중심적인 기능은 조선시대 창궐했던 천연두, 역질, 역병, 염병이라고 하는 두창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시기상으로 영·호남 지역 벅수가 17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제작 조성되고 있는 점에 비춰볼 때 제주 돌하르방의 조성 시기도 거의 이에 맞물린다.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전북 부안읍성 동문 안 벅수는 현종 12년(1671년)으로 돼 있고, 부안읍성의 서문 안 당산의 벅수는 숙종 15년(1689년)에 제작됐다. 동문의 하원당장군은 제주읍성의 돌하르방 얼굴 이미지와도 유사했다.
형상적 측면에선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인면형에 속하면서도 무사(武士)인 장군 형상을 지닌다. 연구진은 "육지부 귀면형 벅수는 거의 손이 없고 특히 얼굴 모습을 강조하는데 혀, 수염, 날카로운 이빨이 사악한 괴질이나 역병을 가져오는 잡귀신에 대한 저항 무기"라며 "이에 반해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벙거지형 모자, 큰 눈방울, 주먹코, 뭉툭한 볼, 얼굴 형상 등 인면형이지만 위 아래로 누르는 큰 손이 있어 잡귀들을 누를 수 있는 압권의 형상"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어 "대정현성·정의현성의 돌하르방은 인면형이면서도 육지의 마을 미륵 벅수와 닮아있고, 제주읍성 돌하르방과는 형상 면에서 확연히 구분된다"며 "돌하르방은 육지의 성문벅수나 마을벅수처럼 민간신앙 면이나 무속적 관념은 거의 남지 않다"고 전했다.
연구책임자인 좌혜경 박사는 "제주 돌하르방이 지방민속유산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고 근간에 많은 돌하르방이 세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육지부 벅수와 공동 보전 방안 모색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17세기에서 18세기 조선조 숙종과 영조 당시에 만연했던 전염병인 '천연두'라는 역병을 물리치기 위해 인면, 괴면, 미륵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석상들은 자연 속에서 민신(民神)이 되어 있으나, 300년이나 지난 시간 속에서 석상은 마모되고 그 형태도 손상되어 시급한 보전 정책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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